2025/06 214

<변호인 2/2> 부림 사건의 영화적 재구성

영화 은 1981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 사건'을 토대로 한다. 당시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서적 읽기 및 공산주의 혁명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기소한 사건이다. 이들은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 고문',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부림'이라는 명칭은 '부산의 학림(學林)'이라는 말을 줄여 붙인 것으로, 앞서 발생한 서울의 '학림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은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재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부림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송우석이라는 변호사의 성장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용해시킨다. 감정적 진실의 ..

영화 2025.06.14

<변호인 1/2> 국가와 개인의 대결 – 헌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1980년대 초 부산의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 은 국가와 개인, 권력과 양심 사이의 처절한 대결을 통해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해야 할 정의가 어떻게 현실에서 참혹하게 왜곡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창기 변호사 시절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영화는 '헌법'이라는 상징을 중심축에 세움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질문을 던진다. 1981년 부림사건: 역사적 배경 영화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부산 지역의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부림'이라는 명칭은 앞서 발생한 '무림사건', '학림사건'의 '림'자 돌림에 맞춘 것으로,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

영화 2025.06.14

끝없는 부채 : 미국 의회는 왜 예산을 줄이지 못할까?

미국의 부채가 매년 증가하는 현상을 '지출 과잉'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 정부의 지출 구조가 정치적·구조적·역사적으로 이중적인 압력 속에 갇혀 있다는 데 있다. 바로 국방과 복지라는 두 기둥이다. 이 두 영역은 각각 전통적 보수와 진보의 핵심 정책 요구를 대변하지만, 어느 하나도 줄이지 못한 채 함께 팽창해왔다. 국방비 2024년 미국의 군사비는 9970억 달러로, 전 세계 군사비의 37%를 차지했다. 이는 중국을 포함한 다음 9개국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많은 규모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군사비는 2조 7,180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미국이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

시사 2025.06.14

세금은 왜 모자랄까: 미국의 조세 구조와 재정 적자

미국의 천문학적 부채를 논할 때, 우리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의료비가 너무 많이 든다, 국방예산이 과도하다, 복지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식의 '지출 과다론'이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동전의 한 면만 보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미국이 필요한 만큼 세금을 걷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왜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충분한 세수를 확보하지 못하는가? 미국 조세의 역사적 딜레마: 반세금 문화의 뿌리 미국의 조세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표 없이는 세금도 없다"라는 독립혁명의 구호가 보여주듯, 미국은 태생적으로 조세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출발한 국가다. 이런 문화적 DNA는 연방정부의 세수 기반을 구조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1913년 수정헌법 16조로 연방소득세가 합헌화되기 전까지..

시사 2025.06.13

오드리 이후의 지방시

1990년대 초, 할리우드 황금기의 마지막 별 오드리 햅번은 더 이상 은막 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의 오랜 파트너였던 위베르 드 지방시 역시 조용히 자신이 평생 일구어온 메종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세기 가까이 함께 써내려온 그들의 미학적 서사는 두 주인공이 무대에서 물러난 후에야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패션의 역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 시대의 정신과 감성을 옷이라는 매체로 구현해낸 완전한 예술 작품이었다. 세상은 그 공백을 통해서야 오드리와 지방시가 창조한 유산의 진정한 깊이를 깨닫게 되었다. 오드리의 마지막 장: 패션에서 인도주의로 말년의 오드리 햅번은 스크린을 떠나 1988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제3세계를 누비며 살았다. 흥..

패션 2025.06.13

SAB 발레 교육의 딜레마

SAB는 세계 무용계에서 엄격한 기준으로 유명하다. SAB 졸업생들은 뉴욕시티발레의 95% 이상을 구성하며, 미국 전역과 전 세계 무용단의 주요 구성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많은 학생들이 다른 길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SAB의 구조적 특성상 이탈은 필연적 과정이며, 이는 실패가 아닌 다양한 선택의 갈래점을 의미한다. 발란신 스타일의 명확한 기준 SAB의 교육 철학은 조지 발란신의 미학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러시아 고전주의에 기반하면서도 발란신이 정제한 발레 미학은 정밀성, 제어력, 확장성, 속도, 그리고 음악성을 핵심 요소로 한다. 이러한 명확한 스타일적 정체성은 동시에 배제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서사적 표현에 더 끌리는 무용수, 클래식한 라인과 안정적인 중심을 추구하는 무..

발레 2025.06.13

빚으로 쌓은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부채는 한 나라가 어떻게 신용을 무기로 세계 패권을 장악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18세기 독립국가로 출발해 20세기 패권국이 되고, 21세기 세계 최대 채무국이 된 미국의 궤적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신용'이다. 건국의 설계도: 해밀턴의 부채 국유화 전략 미국의 부채 역사는 독립전쟁의 포연 속에서 시작된다. 1783년 독립을 쟁취했지만, 신생국은 전쟁 비용으로 발생한 막대한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13개 주가 각각 다른 부채를 떠안은 채 연방 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1790년,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제시한 해법은 파격적이었다. 각 주의 전쟁 부채를 연방정부가 모두 떠안아 통합 상환하겠다는 것이다. 해밀턴은 "공공 신용이야말로 국가의 생명선"이라고 선언하..

시사 2025.06.13

<1987 2/2> 보통 사람들의 연대

고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하는데, 이는 영화 초반부에 빠르게 다뤄진다. 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 중간에 박처장(김윤석) 얼굴 위로 전두환의 얼굴이 중첩되는 장면에서 이 비극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명명백백히 드러낸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대신 교도관, 대학생, 기자, 주교, 그리고 이름 없는 시민들이 화면을 채운다. 이들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을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바로 이 평범함에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동력을 발견한다. 이 보여주는 것은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작은 양심의 목소리들이 모여 만들어낸 변화의 물결이다.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의 여정은 이 영화의 핵심을 압축한다. 그는 처음부터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었다. 오히려 체제 안에..

영화 2025.06.13

<1987 1/2> 말하지 않는 자들

영화 은 '말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끝내 말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박종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고백의 대상이 되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는 끝까지 감춰야 할 위험이 된다. 침묵은 때로는 공포이고, 자기 보존이며, 타협이기도 하다. 체제의 충실한 수호자, 박처원의 침묵 가장 인상적인 침묵의 인물은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김윤석)이다. 그는 명백한 악역이다. 고문을 주도하고, 조직을 방패 삼아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단순한 괴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체제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관료형 악'의 전형이다. 그의 침묵은 의도적이고 계산적이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진실보다 질서를, 정의보다 안정을 택한 사..

영화 2025.06.13

기술 정체기의 삼성전자: 패러다임의 전환

반세기 동안 우리는 기술의 필연적 진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매년 더 빠른 프로세서, 더 선명한 디스플레이, 더 정교한 센서가 등장했고, 이는 곧 기업의 성장과 직결되었다. 그러나 2020년대 중반, 이 진보의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무어의 법칙은 완전히 종료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18-24개월마다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2배씩 증가하는 속도는 현저히 둔화되고 있으며, 인텔조차 이를 3년마다 2배로 수정한 '무어의 법칙 2.0'을 발표할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이 구조적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더 이상 '성장'이 아닌 '생존'의 논리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시점이다. 기술 한계의 물리적 현실 삼성전자가 직면한 첫 번째 현실은 반도체 기술의 물리적 한계다. 3나노미터 공정 이후 미세화는..

시사 2025.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