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1987>은 '말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끝내 말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박종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고백의 대상이 되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는 끝까지 감춰야 할 위험이 된다. 침묵은 때로는 공포이고, 자기 보존이며, 타협이기도 하다.
체제의 충실한 수호자, 박처원의 침묵
가장 인상적인 침묵의 인물은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김윤석)이다. 그는 명백한 악역이다. 고문을 주도하고, 조직을 방패 삼아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단순한 괴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체제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관료형 악'의 전형이다. 그의 침묵은 의도적이고 계산적이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진실보다 질서를, 정의보다 안정을 택한 사람의 냉혹한 선택이다.
박처원의 침묵은 개인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체제의 부품으로서 작동하며,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침묵은 가장 위험한 종류의 침묵이다. 양심의 가책도, 도덕적 고민도 없이 유지되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실제 박처원은 평안남도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17세에 홀몸으로 남하하여 '빨갱이'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공안경찰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 침묵은 반공이라는 신념과 조직에 대한 충성이 결합된 결과였다.
일상적 침묵의 풍경
그러나 박처원만이 침묵의 인물은 아니다. 검사 최환(하정우)의 직속 상관들, 언론사 간부들, 조심스러운 공무원들 모두 진실에 일정 부분 다가간다. 그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무기력하게 침묵하고, 일부는 애써 모른 척한다. 또 다른 일부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등을 돌린다.
《1987》은 이처럼 말하지 않음이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모습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진실을 말하지 않아야 살아남는 구조, 말하지 않기로 서로 묵인하는 조직, 말하지 않음을 강요당하는 관계들. 영화 속의 '침묵'은 단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체제 전반에 퍼진 일종의 생존 매뉴얼이다. 침묵은 하나의 사회적 기술이 되었고, 공동체의 암묵적 규칙이 되었다.
침묵에서 고백으로
한병용(유해진)은 오랫동안 침묵해온 사람이다. 그는 정의감 넘치는 인물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교도관이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묵인해온 폭력의 흔적이 눈앞에 남았을 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다. 그가 건네는 말은 비장하지도, 고결하지도 않다. 오히려 어눌하고 작다. "이 사람 고문으로 죽었어요." 하지만 바로 그 작은 말이 하나의 균열을 만든다.
여대생 연희(김태리) 또한 침묵의 관찰자에서 말하는 주체로 변모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삼촌 한병용이 교도관임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게 되면서도 한동안 말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애정과 진실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 이한열의 죽음과 거리의 함성 앞에서 움직인다. 그 침묵의 시간은 그녀가 어떤 거대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외면할 수 없는 작고 구체적인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87》이 말하는 윤리의 핵심은 확신이 아니라 감각이다. 끝내 외면하지 못한 양심의 감각,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임계점에서 윤리가 탄생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일정 시간 침묵한 끝에 말하게 되며, 그 과정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복잡성과 주저함이야말로 영화가 말하는 윤리의 진실이다.
침묵의 시간을 통과하는 용기
검사 최환의 경우는 더욱 복합적이다. 그는 처음부터 의혹을 품고 있었지만,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압력과 회유에 직면한다. 상급자들의 만류, 동료들의 시선, 가족의 안전에 대한 우려까지. 그의 수사는 진실을 향한 직진이 아니라 침묵과 고백 사이의 끊임없는 줄다리기다. 이런 점에서 그의 용기는 더욱 값지다. 확신에서 나온 용기가 아니라 의심과 두려움을 껴안고 가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1987》은 그래서 '고백의 영화'라기보다는 '침묵의 시간'을 거쳐 고백에 이르는 윤리적 내면의 궤적을 조명하는 영화다. 말하지 않음은 악의 동조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용기의 전 단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침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침묵하는 사람들, 주저하는 사람들, 그리고 끝내 말하는 사람들. 이 연속된 흐름 속에서 진실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1987》이 보여주는 것은 침묵이 언제나 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침묵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언젠가는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계속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작은 목소리라도 낼 것인가.
영화는 그 순간을 묻는다. 당신은 왜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언젠가 말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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