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기술 정체기의 삼성전자 - 패러다임의 전환

엘노스 2025. 6. 13. 08:48

 

반세기 동안 우리는 기술의 필연적 진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매년 더 빠른 프로세서, 더 선명한 디스플레이, 더 정교한 센서가 등장했고, 이는 곧 기업의 성장과 직결되었다. 그러나 2020년대 중반, 이 진보의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무어의 법칙은 완전히 종료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18-24개월마다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2배씩 증가하는 속도는 현저히 둔화되고 있으며, 인텔조차 이를 3년마다 2배로 수정한 '무어의 법칙 2.0'을 발표할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이 구조적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더 이상 '성장'이 아닌 '생존'의 논리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시점이다.

기술 한계의 물리적 현실

삼성전자가 직면한 첫 번째 현실은 반도체 기술의 물리적 한계다. 3나노미터 공정 이후 미세화는 더 이상 자동적인 성능 향상을 보장하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2022년 6월 세계 최초로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기반 3나노 공정 양산을 시작했지만,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인한 수율 안정화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더 심각한 것은 수율 문제다. 2023년 기준 삼성전자의 3나노 수율은 약 60-70% 수준으로, 대형 고객사가 요구하는 70% 이상에 근접했지만, TSMC의 3나노 수율 80%에는 여전히 못 미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투자 대비 수익률의 급격한 하락


반도체 팹 구축 비용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폭증한다. 실제로 새로운 반도체 제조 시설 건설에 드는 비용이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건설 비용이 30억–40억 달러에 달하는 것도 흔한 일이고, 규모가 가장 큰 공장 중 일부는 그 건설 비용이 100억 달러를 훨씬 넘을 수도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5나노 반도체 개발비용(5.4억달러)은 65나노 반도체 개발비용(28백만달러)의 20배이며, 5나노 펩(Fab) 건설비는 54억 달러로 65나노 펩 건설비 4억달러보다 13배나 높다. 

반도체 시장조사기관 더인포메이션네트워크에 따르면 TSMC의 2023년 3나노 공정 파운드리 가격이 웨이퍼 한 장당 1만9865달러로 5나노 공정(1만3400달러)보다 약 50% 비싼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기술 개발의 경제적 지속가능성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ESG와 기술윤리라는 새로운 제약

삼성전자는 2022년 9월 RE100에 가입하며 2050년까지 사용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미국, 유럽, 중국 사업장에서는 2020년 RE100을 달성했지만, 핵심 반도체 사업장이 위치한 한국에서는 재생에너지 공급 여건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그린피스 분석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2030년 100% 재생에너지 전환을 달성할 경우 감축하게 되는 온실가스는 1억6196만톤으로 서울시 온실가스 배출량의 3배를 넘는 규모이며, 2030년 한 해에만 124억4500만 달러(한화 15조70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는 2022년 '新환경경영전략'을 발표하며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설정했다. 2030년 가전·휴대전화를 담당하는 DX부문부터 탄소중립을 우선 달성하고, DS부문을 포함한 전사는 2050년을 기본 목표로 최대한 조기 달성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에너지 집약적인 반도체 제조업의 특성상 제조원가 상승을 의미하며, 기존 경쟁력 공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시장 포화와 소비 패턴의 구조적 변화

스마트폰 시장의 성숙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023년 글로벌 스마트폰 교체 주기는 역대 최장인 43개월(약 3년 7개월)을 기록했다. 이는 2020년 40개월 수준에서도 더 길어진 것이다. 다만 한국의 경우 약정 시스템의 영향으로 약 2년 9개월(33개월) 수준으로 글로벌 평균보다는 짧지만, 과거 2년 수준에 비해서는 상당히 길어진 상황이다. 2024년에는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이 6.2% 성장세로 돌아섰지만, 2025년 다시 성장률이 둔화되면서 2028년까지 연평균 2.6%의 낮은 성장률을 이어갈 것으로 분석된다.

최신 스마트폰 가격이 200만원을 넘어서면서 최저임금 월급(209시간 기준 201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어지간하면 폰을 바꾸지 않고 쓰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중국 브랜드의 부상


2024년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과 애플이 각각 1위와 2위를 유지했지만, 샤오미가 상위 5개 브랜드 중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3위를 기록했고, 비보는 중국 시장에서 1위 브랜드로 자리 매김했다. 이들 중국 브랜드들은 삼성과 유사한 사양을 훨씬 낮은 가격에 제공하며, 특히 신흥시장에서 삼성의 점유율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기대를 모으고 있는 생성형 AI를 탑재한 스마트폰 시장에 대해서는, 생각만큼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AI폰이 전체 출하량 중 차지하는 비중이 2024년 12%에서 2025년 20%, 2026년 31%로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당초 기대만큼 '슈퍼 사이클'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공급망 재편

미국과 중국 간 기술 디커플링이 가속화되면서 삼성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해 있다. 중국은 삼성의 주요 시장 중 하나이지만, 미국의 대중 제재 강화로 중국 사업 확장에 제약이 따른다. 특히 반도체 부문에서는 미국의 수출 통제가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어, 삼성의 글로벌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

각국 정부는 핵심 부품의 국내 생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삼성의 비용 효율적 글로벌 생산체제에 도전이다. 한국이 2024년에 전년 대비 41% 증가한 220억 달러를 메모리 반도체 팹에 투자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처럼, 각국의 반도체 자립화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생존 전략

삼성의 미래는 단순한 제품 판매가 아니라 플랫폼 구축에 달려 있다. 갤럭시 생태계를 중심으로 한 서비스 통합, 삼성 헬스케어 플랫폼의 확장, 스마트홈 허브로서의 위치 확보가 핵심이다. 아이폰이 하드웨어 판매보다 서비스 수수료로 더 많은 수익을 내는 것처럼, 삼성도 제품 너머의 가치 창출에 집중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2024년 하반기부터 3나노 2세대(SF3) 공정 양산에 들어가 추격에 나섰다. 3나노 2세대는 삼성전자의 이전 4나노 핀펫 공정 대비 성능이 22% 빨라지고, 전력 효율은 34% 향상됐으며, 로직 면적은 21% 더 작은 크기를 제공한다. 가격경쟁력을 앞세운다면 엔비디아, AMD 등으로부터 3나노 파운드리 수주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소비자 시장의 성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은 B2B 영역 확대가 필요하다. 특히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자동차용 반도체, 산업용 디스플레이 등에서 삼성의 기술적 강점을 활용할 수 있다. 이 분야는 소비자 시장 대비 수익성이 높고 교체 주기도 예측 가능하다.

TSMC가 계획대로 2040년 RE100을 달성한다면, 삼성전자는 용인 국가산단 가동 시점부터 이미 TSMC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삼성전자는 2050년 목표를 2030년으로 앞당기는 등 보다 적극적인 환경경영 전략이 필요하다.

삼성전자의 미래는 과거와 같은 폭발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어의 법칙이 둔화되고, 스마트폰 교체 주기가 43개월로 연장되며, ESG 요구사항이 강화되는 환경에서는 과거의 성장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기술 정체기에 요구되는 것은 화려한 혁신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혁신, 규모의 확장이 아니라 가치의 심화다.

삼성은 이제 '더 빠르고 더 큰' 성장 대신 '더 의미 있고 더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쌓은 기술력을 AI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스마트폰 생태계를 헬스케어와 모빌리티로 확장하며, 제조업의 경험을 서비스업의 역량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술 성장이 둔화된 세계에서 승리하는 것은 가장 빠른 기업이 아니라 가장 적응력 있는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