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중앙은행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연준이 행사하는 권력은 국경을 초월한다. 워싱턴 D.C.의 한 회의실에서 내려진 금리 결정이 몇 시간 만에 서울과 뭄바이, 상파울루의 주식시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이는 마법이 아니라, 달러가 세계 금융질서의 절대적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2023년 4분기 기준 전 세계 외환보유고의 약 58.4%가 달러 자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제무역에서 달러의 지배력은 더욱 압도적이다. 전 세계 수출 인보이싱(trade invoicing)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54%에 달하며, 외환거래에서는 88%라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든, 브라질의 대두든, 대만의 반도체든 – 거의 모든 주요 상품의 국제거래가 달러로 결제된다. 심지어 미국과 전혀 관계없는 한국과 독일 간의 무역조차 달러를 매개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신흥국의 달러 의존과 연준의 간접 통제
이러한 달러 중심 시스템에서 연준의 정책 변화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킨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신흥국이다.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면 글로벌 자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찾아 미국 채권으로 몰려든 자금은 신흥국에서 빠져나간다. 그 결과 신흥국 통화는 급락하고, 달러로 표시된 부채를 안고 있던 정부와 기업들은 상환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9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 2010년대 중반 브라질과 터키의 통화위기가 모두 이런 패턴을 따랐다.
반대로 연준이 금리를 인하하면 '유동성 홍수'가 발생한다. 저금리에 목마른 자본이 더 높은 수익을 찾아 신흥국으로 몰려들면서 해당 국가들은 자산 버블과 인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린다. 연준의 정책 한 번의 선회가 수십 개국의 통화정책 방향을 사실상 결정하는 셈이다.
트리핀 딜레마
이러한 달러 중심 체제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 벨기에 출신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1960년에 지적한 '트리핀 딜레마'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달러가 국제 기축통화 역할을 하려면 미국은 지속적으로 달러를 해외에 공급해야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의미한다. 하지만 적자가 계속 늘어나면 달러에 대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트리핀은 1959년 미국 의회에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예측했으며, 1971년 닉슨이 금 태환을 중단하면서 그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딜레마는 계속되고 있다. 달러 체제를 유지하려면 미국은 끊임없이 경상수지 적자를 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내부 경제 안정과 글로벌 책임 사이에 긴장이 발생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책임의 비대칭성이다. 미국은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독점적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로 인해 다른 국가들이 겪는 충격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연준이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급격히 금리를 올릴 때, 그 여파로 아르헨티나나 터키가 통화위기를 겪더라도 연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달러 패권에 도전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어 왔다. 유럽연합은 유로화를 통해 달러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기축통화를 만들고자 했다. 현재 유로화는 전 세계 외환보유고의 약 20%를 차지하며 달러에 이어 두 번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적극 추진하며 달러 의존도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위안화는 아직 글로벌 외환보유고의 2-3%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이나 최근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논의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달러의 독주다. 달러의 지위는 단순히 미국의 경제 규모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뉴욕을 중심으로 한 정교한 금융 인프라, 영미법계의 법적 안정성, 미국의 군사력과 외교적 영향력까지 –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달러에 대한 종합적 신뢰를 만들어낸다. 중국 위안화가 경제 규모에 비해 국제적 사용도가 낮은 이유는 자본 통제와 제한된 유동성 때문이다.
연준의 국제적 영향력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연준은 한국,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 등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해 달러 유동성을 공급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기존 5개 주요 중앙은행(유럽중앙은행, 일본은행, 영국은행, 스위스국립은행, 캐나다은행)과의 상설 스와프 라인을 확대하고, 한국,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 등 9개국과 임시 스와프 협정을 재체결했다.
코로나19 위기 초기 3개월 동안 연준의 대차대조표가 3조 달러 증가했는데, 이 중 약 4,500억 달러(약 6분의 1)가 외국 중앙은행과의 달러 유동성 스와프였다. 이는 연준이 사실상 '글로벌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같은 공식적인 국제기구보다도 연준의 한 마디가 더 큰 파급력을 갖는 이유다.
하지만 연준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기관이다. 연준의 이중 책무(dual mandate)는 물가 안정과 완전고용 달성이며, 이는 철저히 미국 경제를 기준으로 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아무리 글로벌 경제에 대해 언급하더라도, 정작 정책 결정에서는 미국의 이익이 우선이다.
2008년 연준 내부 회의록을 보면, 유럽 중앙은행들에 대한 스와프 라인 제공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지만, 신흥국에 대해서는 상당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연준이 글로벌 고려사항을 정책에 반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연준 설립 취지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변화하는 세계, 흔들리지 않는 달러 패권
최근 들어 달러 패권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IMF에 따르면 달러의 글로벌 외환보유고 점유율은 2015년 66%에서 2024년 3분기 57.4%로 8.6%포인트 감소했으며, 이는 1994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미중 갈등 심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금융 제재, 브릭스(BRICS) 국가들의 탈달러화 논의 등이 그 배경이다. 2024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는 자국 통화를 이용한 무역 및 금융 결제 시스템 구축 방안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구조적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70년 넘게 구축된 달러 중심 시스템에서 달러의 점유율 감소는 특정 경쟁국이 아닌 여러 통화에 분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일부 영역에서는 오히려 달러의 지위가 강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달러 표시 채권 발행 비중은 2010년 49%에서 2024년 64%로 증가했다.
달러 제국의 미래
연준은 더 이상 단순한 중앙은행이 아니다. 달러라는 글로벌 통화의 관리자이자, 사실상 세계 금융질서의 설계자 역할을 하고 있다. 트리핀은 1960년 의회 증언에서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 "전 세계에 달러를 공급하는 것은 한 국가와 한 통화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라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워싱턴의 연준 건물에서 내려지는 결정들이 뉴욕과 런던의 거래소를 거쳐 서울의 환율, 자카르타의 물가, 라고스의 대출 금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경 없는 금융의 시대에, 연준의 권력 또한 국경을 모른다.
달러의 제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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