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부동산 가격이 높은 나라였다. 특히 도쿄 중심부의 상업지가는 상상 이상의 수준이었고, ‘도쿄 땅을 모두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 거품은 1991년을 전후로 급격히 붕괴됐고, 일본 경제는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침체에 접어들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 부동산 시장은 또 다른 국면에 있다. 과거 거품의 충격은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이번에는 지역 간 가격 격차와 거주비 부담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는 다시 외국 자본의 유입과 함께 자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는 반면, 지방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빈집이 급증하며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거품의 기원
일본 부동산 거품의 시작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압박으로 엔화 가치가 빠르게 상승하자, 일본 정부는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5%에서 2.5%로 인하했다. 시중에 풀린 자금은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몰렸고, 자산 가격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이 시기 일본 사회에는 이미 ‘토지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뿌리 깊게 퍼져 있었다. 1960~70년대 토지 가격이 50배 넘게 폭등하는 동안 소비자물가는 두 배 남짓 오르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심리 속에서 대형 은행과 지방 금융기관들은 경쟁적으로 부동산 담보 대출을 확대했다.
그 결과, 1991년 도쿄의 평균 주택 가격은 1983년 대비 약 2.5배, 상업지가는 3.4배까지 상승했다. 도쿄증권거래소의 상장 주식 총액은 당시 뉴욕증권거래소의 1.5배에 달했다. 다만 이 과열은 수도권·도시권에 집중됐고, 지방 중소도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상승세를 보였다.
붕괴 이후: 도쿄는 회복, 지방은 정체
버블 붕괴 이후 일본 부동산 시장은 장기간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도쿄 지역 맨션 가격은 1990년 고점 대비 2001년까지 56.1%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 도쿄는 대형 복합 개발과 외국인 투자 유입, 저금리 기조를 배경으로 점진적 회복에 성공했다.
반면 지방 도시들은 실수요 감소와 고령화 심화로 인해 회복이 더디거나 멈춰섰다. 특히 아베 신조 정권이 추진한 아베노믹스 이후 양극화는 더 뚜렷해졌다. 엔저와 금융완화로 일본 자산이 해외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면서, 도쿄 오피스·고급 맨션 시장에 미국·홍콩·싱가포르 등의 자금이 본격 유입됐다.
2024년 현재: 도쿄는 다시 버블인가?
2023년 도쿄 23구의 신축 맨션 평균 분양가는 1억1483만 엔으로, 사상 처음 1억 엔을 돌파했다. 부동산경제연구소가 집계를 시작한 1974년 이후 최고치였다. 2024년 상반기에도 상승세는 지속됐으며, 평균 분양가는 1억1000만 엔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부 고급 단지는 1억2000만 엔에 근접한 거래가 이뤄졌다.

중고 시장도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도쿄칸테이에 따르면 도쿄 주요 6개 구(지요다, 주오, 미나토, 신주쿠, 분쿄, 시부야)의 21평 규모 중고 맨션 평균가는 2023년 처음으로 1억 엔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런 가격 상승은 도쿄 도심에 집중돼 있으며, 수도권 외곽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도쿄칸테이의 분석에 따르면 도쿄도는 전년 대비 5% 상승했지만,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 등 인근 3개 현은 11년 만에 하락세로 전환됐다.
생활비 부담과 임대 구조의 문제
가격 상승은 주거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국임대관리비즈니스협회 조사에 따르면 2025년 초 도쿄의 원룸 평균 월세는 71,778엔으로, 전국 평균보다 약 2만 엔 높다. 미나토구·지요다구·시부야구 등 핵심 지역은 10만 엔 이상을 기록한다.
일본은 전세 제도가 없기 때문에 초기 입주 비용이 크다. 보증금·사례금·중개료 등을 포함하면 월세의 4~6개월치가 필요하다. 월세 6만 엔 기준으로도 약 30만 엔의 초기 자금이 요구된다. 이런 구조는 특히 사회 초년생과 젊은 층에게 큰 부담이 된다
.
도쿄 내 주거 부담이 커지면서 외곽 지역에서 도심으로 통근하는 비율도 높아졌다. 일부 청년층은 수도권을 떠나 고향으로 이주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지방의 침묵: 빈집 증가와 구조적 한계
도쿄가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동안, 지방은 정반대 상황이다. 2023년 주택·토지 통계조사에 따르면 전국 빈집 비율은 13.8%로 사상 최고치였고, 총 빈집 수는 900만 호에 달했다. 와카야마현·도쿠시마현은 21% 이상으로 전국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2024년 중반, 도쿄대 부동산혁신연구센터 분석에 따르면 ‘기타’ 분류의 방치 빈집만 385만 호에 달하며, 주변 50m 이내 지가 하락 등으로 5년간 약 34조 원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 ‘기타’ 빈집은 실질적으로 관리가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소유자조차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존재한다. 전체 빈집 중 42.8%가 이 유형에 속하며, 2003년 대비 약 1.8배 늘어난 수치다.
멈춰 선 정책
정부는 디지털 정주 도시, 원격근무 장려, 지방 이주 보조금 등의 정책을 시도했지만, 수도권 집중을 뒤집지는 못했다. 일자리, 교육, 의료 인프라의 구조적 격차가 여전히 크기 때문이다.
도쿄에서는 여전히 대규모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시부야, 아오야마, 워터프런트 등지에서 복합 재건축과 고급 맨션 공급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발은 외국 자본과 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고, 저렴한 임대주택 공급은 오히려 줄어드는 실정이다.
금리 정상화가 던지는 새로운 변수
2024년 일본은행은 17년 만에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하고 기준금리를 0.5%까지 인상했다. 2026년까지 1%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이는 일본 자산시장 전반에 새로운 조정 압력을 가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금리 인상에 따른 대출 부담 증가가 일부 교외 지역에서 수요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도쿄 중심부는 자산가 중심의 거래가 많아 상대적으로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지역 간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회복 이후의 불균형이 남긴 과제
일본 부동산 시장은 더 이상 거품 붕괴의 충격에 머물러 있지 않다. 문제는 회복의 속도와 범위,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불균형이다. 도쿄는 다시 세계 자본이 몰리는 고가 시장으로 재편되는 반면, 지방은 주거 인프라 자체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다.
금리 인상, 빈집 증가, 인구 감소는 앞으로의 시장을 더욱 불확실하게 만든다. 일본의 사례는 단순한 버블의 형성과 붕괴를 넘어, 회복 이후 나타나는 구조적 양극화와 정책의 한계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대책 (1) | 2025.06.29 |
---|---|
부산과 오사카, 인구 감소에 맞서는 두 도시의 전략 (0) | 2025.06.29 |
미국 기준금리와 한국의 부동산 (3) | 2025.06.28 |
두바이: 탈석유 시대의 쇼윈도 (4) | 2025.06.28 |
아랍에미리트의 탈석유 전략 (1) | 2025.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