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로(BRI)가 단순한 경제 프로젝트를 넘어선다는 사실은 중동과 유라시아 지역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지역은 석유와 가스, 안보 갈등, 민족 분쟁, 대국 간 패권 경쟁이 겹쳐 있는 곳이다. 중국은 이곳에서 인프라를 넘어서 에너지, 금융, 통신, 안보 협력까지 포괄하는 복합 전략을 구사하며 '21세기형 실크로드'를 실현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화려한 발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협정 체결과 실제 이행 사이의 간극, 부채 함정의 현실화, 지정학적 리스크의 증대 등이 이 지역에서 중국의 야심찬 계획에 제동을 걸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명암
중앙아시아는 일대일로 전략의 원점이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나자르바예프 대학교에서 일대일로의 전신인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처음 제안했다. 이후 중앙아시아 5개국은 모두 중국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고, 2024년 교역 규모는 95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국가별 편차는 극명하다. 카자흐스탄은 대중국 부채가 GDP의 3.5%로 관리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키르기스스탄은 심각한 부채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중국 부채가 GDP의 40%인 40억 달러에 달하며, 2025-2027년이 상환 정점으로 전력발전소와 고속도로 등 전략 자산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타지키스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대중국 부채가 GDP의 27%에 달해 이미 금광을 중국 기업에 넘겼고, 2011년에는 1000㎢의 영토를 할양하기까지 했다. 이는 '부채 함정'이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이 지역에서 '테러와 분리주의'에 대한 협력을 강조하며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중심으로 다자안보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23년 이란이, 2024년 벨라루스가 새로 가입하며 회원국이 10개국으로 확대되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조직의 응집력은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중동: 성과와 한계가 공존하는 지역
중동은 최근 중국 일대일로 투자의 최대 수혜 지역이 되었다. 2024년 390억 달러가 투입되어 전체 BRI 투자의 32%를 차지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89억 달러로 단일 국가 최대 규모를 기록했으며, 네옴 프로젝트에는 중국 기업들이 500억 달러 규모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가장 주목받은 중국-이란 협력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2021년 3월 체결된 25년 포괄적 협력 협정에서 4000억 달러 투자가 화제를 모았지만, 중국 외교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실제로 2024년 현재까지 중국의 대이란 실제 투자는 1억 850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는 같은 기간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225억 달러 투자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란의 상황은 미국 제재의 제약을 여실히 보여준다. 25년 협정에도 불구하고 2018-2022년 중국의 대이란 투자는 6억 1800만 달러에 그쳐, 정치적 동조에 비해 경제적 성과는 미미한 상황이다.
이스라엘과의 협력은 제한적이지만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다. 하이파 항만에서 상하이국제항만그룹(SIPG)이 2021년부터 베이포트를 실제 운영하고 있으며, 17억 달러를 투자해 이스라엘 컨테이너 물동량의 14%를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2024년 1월 가자 전쟁으로 인해 중국 해운업체 COSCO가 이스라엘행 운송을 중단하면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현실화되었다.
지정학적 완충지대, 터키와 이란의 엇갈린 행보
터키는 2016년 중국과 BRI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중간회랑 이니셔티브'를 일대일로와 연계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제한적이다. 2023년 BRI 참여도가 전년 대비 100% 감소하는 등 협력이 축소되고 있다. 다만 유라시아 터널, 마르마라이 철도, 차나칼레 대교 등 중국 자금으로 완성된 대형 인프라가 있으며, 2024년 에르도안-시진핑 회담을 통해 관계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터키가 추진하는 '중간회랑' 전략은 러시아를 우회하는 유럽 연결 루트로서 중국에게도 전략적 가치가 있다. 중국-중앙아시아-카스피해-남캅카스-터키-유럽으로 이어지는 이 루트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부상하고 있다.
이란은 미국 제재로 인해 서방과의 협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중국을 외교·경제 생존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제재의 벽 앞에서 실질적 협력은 구호에 그치고 있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유라시아 질서 재편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라시아 물류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이전 중-유럽 철도 화물의 90%가 러시아-벨라루스 경유 북방 루트를 이용했으나, 제재로 인해 35% 이상 감소했다.
대안으로 중간회랑(트랜스 카스피안 루트)이 급부상하고 있다. 카스피해를 건너는 이 루트의 화물 처리량은 2022년 150만 톤에서 2023년 280만 톤으로 86% 증가했으며, 2027년까지 연간 1000만 톤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중국-러시아 협력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러시아의 대중국 석유 수출이 2022년 8300만 톤에서 2024년 1억 800만 톤으로 30% 증가했으며,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을 통한 가스 공급도 계약량을 초과 달성하고 있다. 서방의 제재가 오히려 러시아를 중국 쪽으로 더욱 밀어넣는 결과를 낳고 있다.
수치로 본 일대일로의 현주소
참가국 현황부터 혼재되어 있다. 푸단대학교 녹색금융개발센터는 146-150개국, 미국외교협회(CFR)는 140개국 이상, 중국 공식 발표는 149개국으로 각각 다른 수치를 제시한다. 이는 양해각서(MoU) 체결 기준과 실질적 협력 기준의 차이, 그리고 5년 기한의 MoU 만료 여부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투자 규모는 확실히 증가하고 있다. 2024년 BRI 전체 참여 규모는 1218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2023년 923억 달러 대비 31% 증가한 수치로, 건설 계약 707억 달러, 투자 510억 달러로 구성된다. 누적 투자는 1조 175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일부 국가의 이탈도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가 2023년 7월 탈퇴 의사를 밝혔으며, 조르지아 멜로니 총리는 "이 프로젝트가 이탈리아 경제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야심과 현실 사이의 간극
중동과 유라시아에서 일대일로는 분명한 성과와 명확한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인프라 개발과 지역 연결성 향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다. 철도, 항만, 에너지 시설이 실제로 건설되었고, 지역 간 교역이 증가했다.
그러나 화려한 발표와 실제 이행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중국-이란 4000억 달러 협정처럼 과장된 수치들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으며,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의 사례에서 보듯 부채 함정은 현실화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증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미중 갈등 등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는 중국이 표방하는 '비간섭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규모 확대를 통한 영향력 증진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질적 개선과 지속가능성에 집중할 것인가. 중동과 유라시아에서의 경험은 후자가 더 현명한 선택임을 시사하고 있다.
신실크로드의 길은 계속 뻗어나가고 있지만, 그 길이 진정 '윈-윈'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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