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대일로와 미국, 유럽의 대응

엘노스 2025. 6. 26. 06:14

 

일대일로가 국제 무대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유럽연합도 더 이상 이를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거대한 인프라 네트워크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는 물론 동유럽에까지 뻗어나가며, 기존의 서방 중심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전략이 미국 주도의 '더 나은 세계 재건(Build Back Better World, B3W)'와 EU의 '글로벌 게이트웨이(Global Gateway)'다.

B3W는 2021년 6월 12일 G7 정상회의에서 공식 발표됐다. 당시 바이든 행정부는 이 전략을 "투명하고 지속가능한 개발금융의 대안"으로 규정하며,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대응"임을 분명히 했다.

핵심 분야는 인프라, 기후, 보건, 디지털 전환으로, G7 국가들이 민관협력을 통해 개발도상국 인프라 수요에 대응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일대일로의 양적 팽창에 대응해 질적 표준, 인권, 노동 기준, 투명성 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B3W는 발표 이후 심각한 한계에 직면했다. 첫째, 자금 조달 방식이 불분명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민간 투자 유치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어, 단기 수익성이 낮은 인프라 사업에는 적용이 어려웠다. 둘째, 구체적인 프로젝트나 실행 계획이 제시되지 않았다. 

결국 2022년 6월 독일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B3W는 '글로벌 인프라 투자 파트너십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했다. PGII는 2027년까지 G7 국가들이 총 6000억 달러를 투자하여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격차를 줄이겠다는 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글로벌 게이트웨이

같은 시기, 유럽연합은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내놓았다. '글로벌 게이트웨이(Global Gateway)'는 2021년 12월 1일 유럽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전략으로, 2021년부터 2027년까지 최대 3000억 유로를 투입해 전 세계 파트너 국가들과의 디지털, 에너지, 교통, 보건, 교육 인프라 협력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EU는 이 전략을 통해 단순한 개발원조를 넘어, 가치 기반(Value-based)의 대외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투명한 조달, 환경 기준, 사회적 책무성 등은 명시적으로 일대일로와의 차별점을 강조한 부분이다. 특히, 아프리카(전체 자금의 절반이 아프리카 대상) 및 발칸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EU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EU 내 다양한 기관과 EIB(유럽투자은행), 회원국 개발기구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며, 중국식 '원스톱 모델'과 달리 분산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구조는 유연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집행 속도와 전략 일관성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2022년 11월 EU가 글로벌 게이트웨이 홍보를 위해 메타버스에서 38만 7천 유로를 들여 가상 갈라를 열었으나 단 5-6명만 참석하는 등 홍보와 실행에서 어려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PGII 사무국 설립

2024년 10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개발장관회의에서 PGII 사무국이 공식 설립되어 조정과 이행 추적 기능을 강화했다. 이는 기존의 분산적 구조의 한계를 보완하고 실제 프로젝트 전달 성과를 높이기 위한 중요한 제도적 진전이다.

특히 로비토 코리도르(앙골라-콩고-잠비아 철도 연결) 프로젝트와 아프리카 녹색 에너지 이니셔티브 등 구체적인 대형 프로젝트들이 추진되면서 PGII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숫자로 보면 서방의 대응은 인상적이다. PGII의 6000억 달러와 글로벌 게이트웨이의 3000억 유로(약 3400억 달러)를 합치면 거의 1조 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이는 지난 10년간 일대일로에 투입된 1조 달러와 비슷한 수준으로, 중국이 향후 10년간 추가로 투입할 자금까지 고려하면 여전히 격차가 존재한다.

일대일로가 주로 중국 정부와 국영 개발은행의 양자 대출에 의존하는 반면, PGII와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민간 자본 유치에 크게 의존한다. 이는 더 지속가능한 방식일 수 있지만, 단기 수익성이 낮은 기초 인프라 프로젝트에서는 한계를 보일 수 있다.

일대일로와 PGII·글로벌 게이트웨이를 단순히 '중국 vs 서방'이라는 이분법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양쪽 모두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EU 프로젝트가 동일 국가 안에서 병존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는 중국과의 철도 현대화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EU의 인프라 지원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아프리카 연합(AU)은 일대일로와의 협력을 인정하면서도, EU의 '팀 유럽' 이니셔티브와도 공동 프로젝트를 확대 중이다.

이는 신냉전적 질서와는 다른, 복수의 영향력이 중첩되는 다극적 구조로 볼 수 있다. 수원국 입장에서는 다양한 선택지를 확보하고 협상력을 높이는 전략적 공간이기도 하다.

파나마의 일대일로 탈퇴와 트럼프 2.0 시대

2025년 2월 파나마가 일대일로에서 탈퇴를 발표하면서 중국의 라틴아메리카 전략에 변화가 생겼다. 이는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의 압박과 파나마 운하 주변 중국 영향력 확산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한편 트럼프 2.0 행정부 하에서도 PGII는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 차원에서 초당적 지지를 받으며 정책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어, 향후 서방의 인프라 외교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경쟁 구도가 부정적인 제로섬 경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대일로가 제기한 투명성, 환경 기준, 부채 부담 문제들은 서방이 제시하는 대안 모델의 기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반대로 중국도 최근 들어 '고품질 BRI'를 강조하며 사업 선별과 ESG 기준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2023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3회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서 시진핑 주석은 "작지만 똑똑한(small yet smart)" 프로젝트와 "대형 랜드마크 프로젝트와 작지만 아름다운 프로젝트의 통합적 추진"을 강조했다. 또한 중국 국가개발은행과 수출입은행이 각각 3500억 위안(약 480억 달러)의 융자 창구를 개설하고, 실크로드 기금에 800억 위안(약 110억 달러)을 추가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서방의 압박이 중국의 전략 조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의 일대일로 투자는 2016-2017년 최고치(750억 달러)를 기록한 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23년에는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이는 중국 경제 둔화와 함께 더욱 신중한 접근을 반영한다.

오늘날의 개발 인프라 외교는 단순한 자본 수출이나 영향력 투사 이상의 것이 되었다. 일대일로와 글로벌 게이트웨이, PGII는 각기 다른 철학과 구조, 기준을 갖고 있지만, 모두 수원국에게는 다양한 경로와 조건을 비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다만 서방의 대응책들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고, 민간 자본 동원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적 한계를 고려할 때, 향후 몇 년간의 실행 성과가 이들 이니셔티브의 진정한 경쟁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24년까지 PGII는 목표 대비 약 10%,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약 22%의 자금만 실제 동원하는 데 그쳤으며, 이는 약속과 실행 간의 상당한 격차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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