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버츄&모이어 이야기 3] 주니어 시절

엘노스 2025. 6. 2. 12:36

 

솔트레이크 올림픽 이후 구채점제로 알려진 6.0 시스템에서 현행 신채점제로 바뀌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구채점제의 고질적인 병폐라면 선수 줄세우기 관행일텐데 대회 당일 수행에 의거하기보다는 선수 개인의 명성과 심판의 주관적인 선호도 혹은 애국심에 따라 순위가 정해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설령 판정 논란이 일더라도 '난 이 선수가 더 좋아'라는 심판의 한마디면 반박하기가 어려웠던 주관성 짙은 6.0 채점제를 지양하고, 평판이나 심판의 자의성이 아니라 performance, 즉 '수행'에 근거하는 객관적인 판정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것이 현행 신채점제의 취지인데, 문제는 제도가 바뀌어도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이상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죠. 현행 PCS를 구채점제 방식으로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신채점제과 구채점제의 차이점이라면, 신채점제는 점프나 스핀처럼 어떤 한 부분에 특화된 선수보다는 모든 부문에 골고루 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 혹은 '토탈 패키지'를 지향하고 또 우대하는 점입니다. 여자 싱글은 연아 선수가 대표적이고 남자 싱글은 패트릭 챈, 아이스댄스는 버츄&모이어가 신채점제를 대표하는 스케이터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03-04시즌에 버츄&모이어가 ISU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인 슬로바키아 대회에서 새 프로그램을 선보였을 때 ISU 위원회 멤버 두 명이 코치인 폴 매킨토시를 찾아와서 버모네의 오리지널 댄스가 바로 그들이 원하는 신채점제형 프로그램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더군요.

 

2004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11위로 시즌을 마감한 이후 버모네의 코치가 마리나 주에바/이고르 슈필반트로 바뀌었는데, 그 둘을 본 마리나 주에바가 인상적인 얘기를 했었죠. 참고로 주에바는 전설적인 페어인 G&G의 절친한 동료이자 안무가였고, 그린코프가 연습 도중 갑자기 쓰려져서 사망한 날에 G&G와 함께 아이스링크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테사와 버츄가 나와 이고르가 자신들의 새 코치로 적합한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미시간에 처음 왔던 날, 난 카티아/그린코프와 동일한 정신과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았다.(느꼈다)" 

 

신채점제의 단점이라면 기술적인 요구 사항이 많아서 선수들이 체력적/기술적으로 힘들다는 것이고, 장점이라면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자신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심판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겠죠.

 

프로토콜이 이런 기능을 합니다. 선수와 코치뿐 아니라 일반 피겨팬들 역시 공개된 프로토콜을 통해서 각 선수들의 장점과 단점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을 보완할 필요가 있는지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스텝이나 스핀에서 레벨이 평소보다(예상보다) 낮게 나왔다면 다음 대회, 혹은 다음 시즌에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강함으로써 더 나은 점수, 향상된 레벨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목표를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죠.

 

개선의 여지가 없는 100% 완벽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봅니다. 언제나 더 나아질 여지가 있죠. 대회를 거듭하면서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이 보통이고, 프로그램 완성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관중과 심판의 반응을 보는 겁니다. 관중은 직관적으로 좋은 프로그램과 아닌 것을 아니까요. 혼자서 프로그램을 몇 차례 클린하더라도 최종 완성도는 언제나 관중이 있는 아이스링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소통 능력과 전문가의 피드백이 필요한 거죠.

세계 탑 레벨 선수들이 그랑프리가 시작되기 전에 B급 대회에 출전해서 프로그램을 심판과 관중에게 미리 선보이고 피드백을 얻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새롭게 바뀐 시스템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것과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고, 버모네는 출발부터 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6.0 구채점제가 폐지된 때가 2004년 여름이었고 캐나다 연맹이 신채점제를 도입한 것은 2005년 내셔널 대회부터였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때부터 시험 제도가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뀐 셈이죠. 신채점제는 제로에서 시작해서 포인트를 쌓아가는 방식이고 포인트가 0.1점이라도 많은 선수가 이기는 방식이니까요. 따라서 특정 한 분야를 잘하는 것보다는 모든 부분에서 골고루 득점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에게 유리한 게임입니다.

 

2004년 캐나다 내셔널 주니어 부문 우승자였던 버모네가 시니어 부문에 올라가서 4위의 호성적을 거둔 때가 신채점제가 도입되었던 2005년 1월 캐나다 내셔널 대회 때였습니다. 04-05시즌 ISU 공인 대회에도 신채점제가 시행되었죠.

 

당시 버모네는 신채점제의 효용을 즉각적으로 깨달았는데, 스캇 모이어는 자신들이 곧바로 신채점제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심판의 구체적이고 빠른 피드백과 명확한 레벨 규정 때문에 어떤 부분을 개선하면 현재보다 더 나은 순위를 얻을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시행 초기부터 신채점제의 장점을 이해하고 활용했던 셈입니다.

 

새 코치인 이고르 쉬필밴드가 04-05시즌 동안 중점을 둔 부분은 버모네의 스피드와 파워를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03-04시즌만 해도 깜찍한 주니어다운 모습을 보였다면 2005년 세계선수권 대회 때는 성숙하고 자신감 있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2005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FD 영상

https://youtu.be/JwxEDgVDEAg?si=ITNrt6R37FJElVHR

 

스캇 모이어의 열정과 긍정적인 에너지, 테사 버츄의 타고난 기품과 우아함이 서로의 빈곳을 채워주는 모습은 주니어 때부터 볼 수 있죠. 

 

주니어 때의 테사 버츄를 볼 때면 마리나 클리모바가 연상됩니다. 스케이터이기보다는 댄서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어린 나이에 음악을 잘 느끼는 걸 보면 감탄하게 되죠. 이때가 만으로 15살인데 음악을 따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고 몸으로 표현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죠.

 

2004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11위였던 버모네는 2005년 대회 때는 2위를 하며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테사 버츄가 스케이팅에 끌리게 된 이유는 여럿 있지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예쁜 의상과 안무의 매력에 끌렸다고 합니다. 사실 스캇 모이어와 막 짝을 이룰 당시만 해도 테사의 주된 관심사는 발레와 모던 무용이었고, 98년에 캐나다 국립 발레 스쿨의 오디션을 받고 합격했을 만큼 재능도 있었죠. 어머니 케이트는 딸이 스케이터보다는 발레리나가 되기를 원했지만, 테사 버츄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스케이팅이었습니다.

 

당시 발레 스쿨의 예술 감독이었던 스테인스는 "불과 아홉 살의 소녀가 모두가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발레 스쿨을 파트너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아홉 살의 테사 버츄에게는 큰 결정이었습니다. 테사의 성실한 성격과 파트너에게 충실한 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죠. 둘의 케미스트리가 환상적인 것도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캇 모이어가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한 동기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 스케이팅 기술을 연마하려는 것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피겨 스케이팅 레슨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이스하키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두 종목의 스케이트화 구조부터 다른 것은 다 이유가 있고 피겨가 아이스하키에 도움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네요.^_^

 

아래는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 때의 갈라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버모네의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Everybody Dance Now:힙합 소년과 발레리나>는 발레리나를 꿈꾼 한 소녀와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고자 했던 소년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파트너가 되는 과정을 담은, 즉 자신들의 얘기일 테니까요.


2005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 갈라

 

https://youtu.be/y4bVYRkA-uk?si=QISzMnWCO8z_qE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