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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가 된 남자, 매튜 본의 상상력

남자 무용수들로만 구성된 를 선보인 안무가, 매튜 본.이 기발한 작품은 단순히 발레의 틀을 깼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전 서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웨스트엔드 키드에서 혁신적인 안무가로 매튜 본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을 보며 자란 '웨스트엔드 키드'였고, 또한 영화광이었다. 그는 196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22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라반센터(Laban Centre)에 입학해 무용을 시작했다. 발레는 보통 10살 전후에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는 확실히 늦깎이였다. 그런데 이 늦깎이 입문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정형화된 발레 동작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춤 잘 추는 무용수는 아니지만 아이디어만큼은 자신 있다고 여겼다..

발레 2025.05.29

박애의 역설과 재즈의 기원

보르헤스의 에는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라는 묘한 에스파냐 신부가 등장한다.16세기,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이 겪는 처참한 현실에 연민을 느끼고, 황제에게 흑인을 대신 데려오자고 제안한다.아이러니하게도 이 '박애적 제안'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까사스 신부는 나중에 식민 농장 제도와 노예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평생을 바쳐 반대했지만, 이미 벌어진 흐름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모순 속에서 흘러가고, 그 결과로 아프리카의 리듬과 감성이 신대륙에 뿌리내리게 된다. 블루스와 재즈는 그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 음악이다. 17세기 노예무역은 주로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향했고, 북미에서는 플로리다, 캐롤라이나 등이 중심지였다. 흑인 노예들은 고향의 리듬을 ..

칼럼 2025.05.29

고대 건축, 비례, 그리고 이상주의 – 이데아와 눈속임 사이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도리아 양식은 육중하고 남성적이며, 이오니아 양식은 가늘고 섬세하며 여성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 차이는 단지 인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 기둥의 비례에서 비롯된다.도리아 기둥의 높이는 반지름의 4-6배로 설계되고, 이오니아 기둥은 8-9배로 더 가늘게 보인다. 고전기 그리스 예술과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처럼 '이상적인 형상'을 전제로 한다. 이들은 수학적 비례 속에 진정한 미가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신체, 우주, 건축 모두에 그 질서를 적용하려 했다.파르테논 신전은 이런 비례 개념이 어떻게 현실에서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이다. 기둥 가운데를 살짝 부풀려서, 아래에서 볼 때 휘어져 보이는 착시 현상을 조정했다. 일상에서도 겪는 일이지만 100층짜리 건물을 각층..

칼럼 2025.05.29

과학과 종교는 언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을까?

우리는 과학과 종교가 대립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둘이 갈라선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7세기 이전까지 과학은 신의 섭리를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자연을 탐구하는 건 곧 신성에 다가가는 일이었다. 그 시초 중 하나가 피타고라스 학파다. 이들은 우주 자체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수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코스모스’라는 말도 이들에게서 나왔는데, 단순히 ‘우주’가 아니라 ‘질서 있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뜻한다. 화장을 뜻하는 영어 ‘cosmetic’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우주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카오스 상태가 아니라 질서정연한 기하학적인 미(美)의 세계이고 이게 곧 코스모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화음이 수학적 비율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발견했고, 이러한 ..

칼럼 2025.05.29

스토아학파의 세계관과 빅뱅 이론: 고대 철학의 우주관

고대 철학자들과 현대 물리학자들은 전혀 다른 언어를 쓰지만, 둘 다 세계의 본질과 구조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스토아학파가 말한 '우주의 질서'와 빅뱅 이론이 설명하는 '우주의 기원과 진화'는 시대를 뛰어넘는 공명 같은 게 있다. 특히 제논이 말한 ‘우주는 불이다’라는 통찰은, 오늘날의 과학으로 들여다보아도 낯설지 않다. 스토아학파의 세계관은 철저한 결정론 위에 놓여 있다. 창시자 제논은 이 우주를 타오르는 불꽃으로 비유했다. 우주는 한 번 크게 타오르고 꺼졌다가 다시 타오르는 순환을 반복하며, 그 불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섭리 자체였다. 제논은 이 불을 ‘로고스’라 불렀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그 불에서 튀어나온 불티에 불과하다고 했다. 죽음은 곧 다시 원래의 불로 돌아..

칼럼 2025.05.29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히포크라테스 문장의 진짜 의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익숙한 문장이지만, 이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크다.마치 삶의 허무를 예술의 위대함으로 덮는 듯한 이 경구는, 사실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서의 서문에 남긴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문맥이라는 점에서, 이 문장은 절반쯤은 오해된 채 널리 퍼져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원문을 살펴보자. Ὁ βίος βραχύς, ἡ δὲ τέχνη μακρή, ὁ δὲ καιρὸς ὀξύς, ἡ δὲ πεῖρα σφαλερή, ἡ δὲ κρίσις χαλεπή.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익숙한 형태가 되었다. vita brevis, ars longa, occasio praeceps, experimentum periculosum, iudicium difficile. 한국어로 옮..

칼럼 2025.05.29

<너의 이름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의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김춘수 시인의 은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존재를 세계 속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창조적 순간이다.그 호명의 순간, 무의미한 몸짓은 비로소 꽃이 되고, 존재는 인식되며 의미를 가진 대상으로 변모한다.이것이 바로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 잃어버린 이름, 희미해지는 자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치히로는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를 잊어가기 시작한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이 사라지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아의 해체이며, 정체성의 소..

애니 2025.05.28

<블랙 스완> 몸에 새겨진 권력

은 푸코의 ‘규율 권력’이 어떻게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이면서도, 동시에 예술가의 자기파괴적 욕망을 함께 담아낸다. 주인공 니나는 완벽한 백조가 되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키고 절제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정상적’이기를 원하며, 자기 감시를 통해 자신을 다듬는다. 이건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의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니나가 자신의 백조 같은 순수함이 관능적이고 자유분방한 블랙스완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난 '비정상'이라고 여기면서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푸코의 정상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니나는 단순히 시스템에 억눌리는 피해자만은 아니다. 그녀는 완벽에 도달하고 싶은, 순수하고도 파괴적인 욕망을 간직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니나는 완성이라는 이름의 절벽 끝까지..

영화 2025.05.28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유혹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얼굴

는 단순한 직장 이야기도, 화려한 패션 업계의 뒷이야기도 아니다. 이 영화는 세련되고 부드러운 얼굴을 한 ‘권력’이 어떻게 사람의 내면을 잠식해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은 푸코가 말한 현대 사회의 권력 작동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1.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내면화로 작동한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의 권력은 고전적 의미의 강압적 통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권력의 기준에 맞춰 행동하도록 만든다. 미란다는 그런 권력의 전형이다. 명확한 지시 없이도 사람들은 그녀의 기준을 따라가고,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자발적으로 바뀌어 간다. 앤디 역시 처음엔 비판적이었지만, 점차 미란다의 룰을 내면화하며 그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킨다. 2. ‘정상성’이라는 규율의 압력 푸코는 ‘정상성’이야말로 현대 권..

영화 2025.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