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테스 - 죄 없는 죄인

엘노스 2025. 5. 30. 13:05

토마스 하디의 1891년작 『더버빌가의 테스』(부제: 순결한 여인)는 단순한 연애소설을 뛰어넘어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의 위선과 편견에 정면으로 도전한 문제작이다. 

불운한 운명의 굴레

소설의 주인공 테레사(테스) 더비필드는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로, 가난한 날품팔이의 딸이다. 그녀의 비극은 아버지가 자신의 집안이 옛 명문가 더버빌의 후손임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가족을 위해 부유한 친척이라고 믿었던 더버빌 가문에 하녀로 일하러 간 테스는, 그곳에서 바람둥이 알렉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하디는 테스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을 탐구한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불운과 시련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에서, 테스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들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이중적 남성상과 여성의 딜레마

소설은 테스를 둘러싼 두 남성, 알렉과 에인절을 통해 당시 남성 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알렉은 육체적 욕망에 충실한 감각적 인물이고, 에인절은 정신적 사랑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두 인물 모두 테스를 자신들의 편견과 이상에 따라 재단하려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특히 에인절의 경우, 테스를 순결한 전원의 여신으로 이상화했다가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되자 냉혹하게 버리는 모습을 통해 하디는 남성들의 이중적 도덕 기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시대를 앞선 여성주의적 관점

<테스>의 가장 혁신적인 측면은 미혼모가 된 테스를 순결한 여인으로 제시한 것이다. 하디는 부제를 통해 명확히 선언한다. 테스는 몸을 더럽혔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순결하다는 것이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보수적인 성 도덕을 지닌 비평가들과 독자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하디는 성적 충동은 모든 자연물이 가진 것이며, 기독교의 윤리로 억압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산업화의 그림자

<테스>는 연애소설인 동시에 농촌을 다룬 본격 웨섹스 소설로서도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하디는 테스의 가족이 속한 가난한 종신 차지농 계층이 점차 몰락해가는 현실을 통해 산업화 과정에서 무너져가는 전통적 농촌 공동체의 모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테스의 아버지가 죽자 가족은 집과 토지를 잃고 갈 곳이 없어진다. 이러한 경제적 절망감이 결국 테스를 다시 알렉에게로 돌아가게 만드는 현실적 동력이 된다. 하디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 사회경제적 조건과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문학적 성취와 기법

작품의 문학적 기법 면에서 하디는 리얼리즘과 시적 요소, 멜로드라마, 민담이 성공적으로 결합된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농촌 풍경의 아름다운 묘사와 테스를 포함한 대부분 작중인물들이 알고 있는 미신, 시골 민요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하고 인물들의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며 불길한 분위기를 고조하는 기법이 특히 인상적이다.

탤보세이스 농장에서 에인절과 테스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의 이미지들은 사랑이 무르익어 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하는 데 효과적이며, 이는 하디가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뛰어난 감각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현대적 의의와 한계

토마스 하디는 당시 영국 사회가 내재하고 있던 인간에 대한 억압에 도전한 용기있는 작가였다는 평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다만 때때로 줄거리 구성을 우연의 일치에 의존한 점이나 작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자주 등장하는 점 등이 기법상의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또한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여전히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그려진 여성상이라는 한계도 있다.

시대를 뛰어넘은 문학의 힘

토마스 하디가 이 작품을 통해 던진 질문들—여성의 성과 순결에 대한 이중 기준, 운명과 의지의 관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스>는 단순히 과거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