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차이코프스키와 호두까기 인형 – 실패한 초연, 불후의 명작

엘노스 2025. 5. 29. 11:39

 

차이코프스키는 불운의 천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곡가다. 

그가 작곡한 발레 작품은 초연 당시 하나같이 혹평을 받았고, 시간이 지나서야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이 모두 그런 길을 걸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 시절,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고 살아야 했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고, 작품 활동 중에도 외부의 압박과 내면의 고통을 동시에 견뎌야 했다.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하던 시기에는 오랜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도 끊어진 상태였고, 무리한 작곡 위촉까지 겹쳐 있었다. 초연 이듬해 그는 마지막 교향곡인 <비창>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E.T.A.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쥐의 왕>이다.

차이코프스키가 사용한 대본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번역한 프랑스어판을 기반으로 하며,

안무는 본래 마리우스 프티파가 맡을 예정이었지만 병으로 하차하면서 레프 이바노프가 대신 무대를 구성했다.

 

이 작품의 전곡에서 여덟 곡을 발췌해 차이코프스키가 직접 구성한 모음곡은 오늘날까지도 자주 연주되며 사랑받는다. 

반면, 1892년 12월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된 발레 무대는 연출이 미완성된 상태였고, 관객 반응은 차가웠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야 <호두까기 인형>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생전 단 한 번도 자신의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호두까기 인형>을 여러 버전으로 보았지만,

1994년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무대가 가장 안정적이고 서사적으로도 설득력이 높다고 느꼈다.

이 공연의 안무를 맡은 바실리 바이노넨은 이바노프의 원안을 기반으로 하되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시도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주인공 클라라를 1막에서는 어린 소녀가, 2막에서는 성인 무용수가 맡도록 구성했다는 점이다. 

이는 단지 무대 연출상의 편의가 아니라, 클라라가 현실에서 환상으로, 

소녀에서 여인으로 이행해 가는 서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치로 읽힌다. 

2막에서 요정이 아닌 클라라 자신이 파드되를 추도록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환상의 주인공이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성장한 나 자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이노넨 버전 이후, 많은 연출들이 이 구조를 변형해 무대에 올렸다. 흥미롭게도 프티파와 이바노프가 활동하던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귀족 사회가 요정과 환상을 즐겼던 반면, 소비에트 시절을 살았던 바이노넨은 그런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요정 장면을 생략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작품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막 1장은 크리스마스 이브, 클라라의 집에서 열린 파티가 배경이다. 

클라라는 대부 드로셀메이어로부터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받고, 이를 탐낸 동생 프리츠와 다투다가 인형이 망가지게 된다. 

드로셀메이어는 고쳐주겠다고 약속하고 파티가 끝난 뒤 모두 잠자리에 든다.

 

1막 2장은 어두운 거실로, 쥐들이 나타나 장난감 병정들과 전투를 벌인다. 

클라라는 슬리퍼를 던져 호두까기 인형을 구하고, 인형은 멋진 왕자로 변한다. 

이후 왕자는 클라라를 환상 속 '과자 나라'로 데려간다.

 

2막은 과자 나라에서 벌어지는 환영 파티를 그린다. 

각국의 민속춤 형식을 빌려 스페인, 아라비아, 중국, 러시아, 풀피리춤 등이 펼쳐진다.

이어지는 꽃의 왈츠는 군무와 음악 모두 압도적이다.

마지막으로 클라라와 왕자의 그랑 파드되(2인무)가 무대를 장식한다.

이 장면은 테크닉과 감정의 절정을 보여주는 클라이맥스다.
결말에서 클라라는 유모의 목소리에 깨어나며 모든 경험이 꿈이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꿈은 단지 환상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이자 감정의 각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대는 조용히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으며 막을 내린다.

 

https://youtu.be/Vy62qQidv6o?si=VsqV6hVa6CoWCk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