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분장실, 아이돌 무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남성 출연자들의 얼굴은 오래전부터 매끈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화장했다’기보다는 ‘피부가 좋다’거나 ‘이미지가 깔끔하다’는 말로 불렸다. 그 사이 남성용 쿠션, 비비크림, 톤업 선크림 같은 제품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거창한 선언 없이, 사용은 서서히 늘었다.
수치로 증명되는 성장세
이 변화는 시장 데이터로도 확인된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와 퓨처 마켓 인사이트에 따르면 2022년 한국 남성 화장품 시장은 약 1조 원 규모였으며, 2025년에는 1조 1600억 원 수준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기초 화장품을 중심으로 한 이 시장은 연평균 약 11%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CJ올리브영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남성 고객의 화장품 구매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스킨케어와 톤업 선크림 같은 제품군이 강세를 보인다.
젠더리스 시대로의 진화
요즘 드럭스토어나 올리브영 매장에서는 남성 전용 진열대를 따로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품에 ‘남성용’이라는 표기가 없어도, 많은 남성 소비자들이 일반 제품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고 있다. 이는 단지 마케팅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제품 자체가 성별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2018년 무렵부터 젠더리스 화장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론칭한 라카는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색조 콘셉트로 주목받았으며, 현재 전국 700여 개 올리브영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성별과 관계없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제품을 고르는 흐름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경계선
하지만 남성 화장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경계선 위에 있다. 유튜브 콘텐츠에서도 피부 보정, 눈썹 정리, 선크림까지는 자연스럽지만, 섀도우나 블러셔, 립틴트로 넘어가면 “무대용으로 참고하세요” 혹은 “이건 좀 과할 수도 있어요” 같은 전제가 붙는다. ‘일상에서는 다소 튈 수 있다’는 인식이 여전히 작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거리의 얼굴은 조금 다르다. 대학가, 카페, 지하철 등에서 틴트를 자연스럽게 바른 입술, 은은한 쉐이딩을 넣은 얼굴을 마주치곤 한다. 절제된 화장은 오히려 오늘날 남성 화장의 하나의 형식처럼 느껴진다.
이 흐름에 불을 붙인 것은 케이팝 문화다. 남성 아이돌은 무대에서 당당히 화장하고, 화장품 브랜드와 협업한다. VT코스메틱은 방탄소년단과 함께 전용 화장품 라인을 출시했고, 네이처리퍼블릭은 엑소와 5년 넘게 협업하며 아시아 전역에 브랜드를 확산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은 감상의 대상이다. 닮고 싶지만 현실에서 그대로 따라 하기엔 거리감이 있다. 무대 위 남성과 일상 속 남성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한다.
세계적 흐름과 연결되는 변화
남성 화장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트랜스페런시 마켓 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남성 화장품 시장은 2023년 기준 약 866억 달러 규모였으며, 2034년까지 연평균 약 6%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으로 꼽힌다.
남성 소비자들이 찾는 제품군도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스킨케어나 면도용품 위주였지만, 최근에는 톤업 선크림, 컬러 립밤, 헤어 트리트먼트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남성 뷰티는 단순한 피부 관리에서 점차 표현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변화의 의미
남성 화장은 더 이상 금기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허용의 범위와 자연스러움에 대한 감각 속에서 제한적으로 소비된다.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얼굴은 하나의 균형점이자 이상처럼 여겨지고 있다.
사회적 인식도 변하고 있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10년대 중반 이후 ‘여성스럽다’거나 ‘남성답다’는 표현보다 ‘젠더리스’라는 개념이 더 자주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화장품 소비 방식이 아닌,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점차 해체되고 있다는 흐름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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