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피부의 민족, 스킨케어 공화국

엘노스 2025. 6. 21. 06:20

 

동아일보 자료

 

2024년 한국의 화장품 수출액은 약 74억 5,000만 달러로, 프랑스에 이어 세계 2위의 화장품 수출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널리 알려진 '10단계 스킨케어'라는 개념은 실상과 다르다는 것이 조사에서 드러났다. 2021년 칸타(Kantar)가 1,500명의 한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아침에 평균 3개의 제품을 사용한다는 응답이 28%로 가장 많았고, 2개 제품만 사용한다는 응답도 23%에 달했다.


‘10단계 스킨케어’라는 용어는 2014년 미국의 뷰티 매거진 Into The Gloss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는 한국계 미국인 기업가 샬럿 조가 운영한 브랜드 'Soko Glam'의 마케팅 전략을 통해 확산되었다. 실제로는 한국 여성들이 복잡한 루틴을 따르기보다는 간결하고 효율적인 관리에 집중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스킵케어'나 '스킨케어 다이어트'라고 불리는 간소화 추세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피부를 통한 자기 증명의 문화


한국 사회에서 피부가 차지하는 의미는 특별하다. 한국의 아름다운 피부에 대한 기준은 수 세기 전부터 유교적 가치뿐 아니라 농경 사회의 계급 구조 속에서 형성된 이상에 영향을 받아, 순수함, 겸손함, 그리고 세련됨을 강조해왔다. 전통적으로 창백한 피부는 야외 노동과 거리를 둔 상류 계층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미덕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외적 표지였다.


현대 한국에서 매끄럽고 밝은 피부는 단순히 미적 기준을 넘어 자기 관리 능력과 사회적 성실함을 나타내는 지표로 인식된다. 피부 상태가 개인의 생활 태도와 자기 통제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로 작용함을 의미한다.


글래스 스킨과 동아시아 미학

 

‘글래스 스킨’ 트렌드는 2010년대 초반 등장했으며,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고 빛나는 피부를 의미한다. 피치앤릴리(Peach & Lily)의 창립자 알리시아 윤에 따르면, "글래스 스킨은 투명하고 반투명한 피부에 대한 개념으로, 젊음의 상징이며 한국에서 가장 추구되는 특성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결'에 대한 집착은 서구의 색조 화장 중심 문화와 대조적이다. 한국의 메이크업은 피부 텍스처를 매끄럽게 다듬고 자연스러운 윤기를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는 외적 표현보다는 내재적 조화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미학과 맞닿아 있으며, '화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화장'을 지향한다.


K-뷰티 산업의 글로벌 확장


K-뷰티 산업의 성장은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 화장품 시장은 2024년 약 175억 달러 규모에서 2034년 약 295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며, 연평균 약 5.4% 성장률이 예상된다. 글로벌 K-뷰티 제품 시장 역시 같은 기간 동안 약 147억 달러에서 318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보이며, 연평균 약 9%의 성장률이 예측된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2025년 1분기 기준, 한국은 5억 달러에 가까운 화장품 수출 실적을 기록하며 미국 화장품 수입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프랑스를 제친 상태다. 중소 K-뷰티 브랜드의 미국 수출도 2024년 3분기 기준 전년 대비 83% 증가해 약 2억 9,000만 달러에 달했다.


과학화되는 스킨케어 담론


K-뷰티 산업은 소비자의 피부를 점진적으로 의료화하고 있다. 피부 장벽, 세라마이드, pH 밸런스, 마이크로바이옴과 같은 과학적 용어들이 일반 소비자 사이에서도 흔히 사용되며, 이는 개인의 얼굴을 진단하고 개선해야 할 ‘프로젝트’로 인식하게 만든다.


2024년, 한국 정부는 AI·데이터 기반 맞춤형 화장품 기술을 미래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관련 연구개발을 확대하고 있다. AI 분석 앱, 유전자 기반 스킨케어도 점차 보편화되고 있으며, K-뷰티는 개인화와 기술화의 방향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K-뷰티의 영향력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6.4%가 한국 뷰티 제품이 일반 대중에게 인기 있다고 답했으며, 25.8%는 K-뷰티가 자국에서 광범위하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인도네시아, 인도, UAE 등지에서 K-뷰티 제품의 수요가 높아졌으며, 이는 지역별 브랜드 성과와 소비자 성향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세계화로 촉진된 문화 교류는 한국 뷰티의 요소들이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 통합되는 하이브리드화로 이어졌다. 각 지역은 K-뷰티 트렌드를 자신들의 문화적 조건과 미적 관습에 맞게 재해석하며 수용하고 있다.


K-뷰티의 성공 이면에는 우려스러운 측면도 존재한다.  피부 관리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사회적 의무처럼 인식되고 있으며, 특히 20~30대 여성 직장인을 중심으로 ‘피부가 안 좋다’는 평가가 점차 ‘자기 관리 소홀’이라는 낙인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 피부는 외모의 일부를 넘어서, 자신을 증명하는 성과 지표가 되었다. K-뷰티는 이러한 문화적 감각을 정교하게 산업화하고 기술화하며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체계로 작동하고 있다. ‘10단계 루틴’이라는 신화는 허구였지만, 피부를 통한 자기 관리와 사회적 평가라는  문화적 구조는 실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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