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TE와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제재는 중국에게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기술 강국을 자처하던 중국이, 핵심 반도체 부품 공급이 중단되자 순식간에 무력해졌다. 중국은 이 상황을 "과학기술의 목이 졸린 상태(卡脖子)"라고 표현했다.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의 생명줄이 타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충격적 깨달음이었다.
이 순간부터 중국의 반도체 정책은 완전히 바뀌었다. '자립자강(自立自強)'이라는 구호가 단순한 슬로건을 넘어 국가 생존 전략으로 격상됐고, 반도체 굴기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야심찬 목표: 국산화 70%의 의미와 한계
2015년 중국 정부가 발표한 '중국제조 2025' 전략의 핵심은 명확했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성된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 일명 빅펀드(Big Fund)는 3차에 걸쳐 천문학적 투자를 단행했다.
빅펀드는 2014년 1기에 987억 위안(약 18조원), 2019년 2기에 2,041억 위안(약 37조원), 그리고 2024년 3기에는 사상 최대 규모인 3,440억 위안(약 64조원)을 조성했다. 총 3차에 걸친 투자 규모만 6,500억 위안(약 119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투자 효과는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SMIC(중국 최대 파운드리)는 14나노 공정 양산을 달성했고, 일부에서는 7나노급 공정도 시도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메모리 기업 YMTC는 128단 3D NAND 양산 역량을 확보했고, CXMT는 DRAM 분야에서 빠른 추격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자급률 70%는 '중국 내에서 생산된 반도체가 전체 수요의 70%를 차지한다'는 의미지, 그 칩들이 모두 순수 중국 기술로 제조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는 미국의 반도체 장비, 네덜란드의 ASML 노광장비, 일본의 화학소재 등 해외 기술에 여전히 크게 의존하고 있다. 겉보기 자급률과 실질적 기술 독립은 다른 개념이다.
YMTC의 굴곡: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적 기업 중 하나가 바로 YMTC(Yangtze Memory Technologies)였다. 2016년 설립된 이 회사는 불과 6년 만에 128단 3D NAND 양산 체제를 구축하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키옥시아 등 기존 강자들을 위협했다. 특히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중국 내수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 진출을 꿈꿨다.
결정적 순간이 2022년이었다. 애플이 아이폰에 YMTC의 NAND 플래시를 탑재하려 했던 것이다. 2022년 4월 애플은 YMTC와 낸드플래시 공급계약을 체결했고, 실제로 2022년 9월 중국에서 판매된 아이폰14 일부 모델에 YMTC 칩이 탑재되기도 했다. 만약 본격적으로 확대됐다면 중국 메모리 반도체의 글로벌 인정을 받는 역사적 순간이 될 뻔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강력한 압박과 YMTC의 수출통제 명단 포함으로 애플은 2022년 10월 협력을 중단했다. 미국 의회는 "애플이 불장난을 하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애플은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례는 중국 반도체 산업이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를 보여준다. 아무리 기술력을 확보해도 지정학적 신뢰 없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기술과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산업임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샤오미의 변신과 토종 AI 칩의 부상
미국의 제재가 강화되는 가운데서도 중국 기업들은 나름의 돌파구를 찾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스마트폰 업계에서 일어났다. 화웨이의 몰락으로 생긴 공백을 샤오미, 비보(Vivo), 오포(OPPO) 등이 빠르게 메우며 중국 내수시장을 장악했다.
특히 샤오미의 변신이 인상적이다. 과거 '가성비 폰'의 대명사였던 샤오미는 이제 자체 칩 설계에 도전하고 있다. 샤오미는 2021년부터 자체 칩 개발을 재시작해 2025년 5월 '쉬안제 O1(Xring O1)' 칩을 공개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4년간 135억 위안(약 2조 6천억원)이 투입됐고, 2,500명 이상의 연구 인력이 참여했다.
또한 2021년에는 자체 개발한 이미지 처리 칩 'Surge C1'을 첫 폴더블폰인 '미 믹스 폴드'에 탑재하기도 했다. 비록 초보 단계이지만, 이는 중국 기업들이 더 이상 해외 의존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AI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 기업들의 자구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바이두는 AI 가속기 '쿤룬(昆仑)'을, 텐센트는 '징퉁(擎通)' 칩을 개발해 자사 클라우드 서비스에 적용하고 있다. 알리바바의 '한광(含光)' 시리즈, 화웨이의 '어센드(Ascend)' 시리즈도 각각의 영역에서 엔비디아 GPU의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들 중국산 AI 칩은 대부분 엔비디아 GPU 대비 연산 효율과 전력 효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더 큰 문제는 대규모 AI 모델 훈련에 필수적인 고성능 인터커넥트 기술과 메모리 대역폭에서 여전히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별 칩의 성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천 개의 칩을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컴퓨팅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도전이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는 단순한 수출 금지를 넘어 전방위적 봉쇄 전략이다. 핵심 장비 수출을 막는 것은 물론, 반도체 설계에 필수적인 EDA(전자설계자동화) 소프트웨어 공급도 중단했다. 시놉시스, 케이던스, 멘터 그래픽스 등 EDA 소프트웨어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 기업들이 독점하고 있어, 중국은 대안 기술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 나아가 미국은 중국 반도체 인재의 미국 유학과 취업도 제한하고 있다. 기술 이전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도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상당 부분 해외 기술과 인재에 의존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효과적인 봉쇄 전략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각에서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한 기술 추격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반도체 기술은 단순한 모방이나 분해 분석으로 습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노미터(nm) 단위의 정밀 공정, 수백 개 공정 단계 간의 미세한 조율, 수십 년간 축적된 공정 노하우 등은 결코 단기간에 재현할 수 없는 기술이다. 더욱이 최신 3nm, 2nm 공정은 물리학의 극한을 다루는 영역으로, 이론적 이해만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빅펀드 부패 스캔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2022년부터다. 빅펀드를 둘러싼 대규모 부패 스캔들이 터져 나온 것이다. 2022년 7월 빅펀드 총책임자인 딩원우(丁文武) 총재가 부패혐의로 체포되었고, 이에 앞서 공업정보화부 샤오야칭(肖亚庆) 부장도 기율위 조사를 받았다.
빅펀드의 유일한 운영사 화신투자관리의 루쥔(路军) 전 총재도 체포되었고, 칭화유니 회장 쟈오웨이궈(赵伟国), 공동회장 땨오스징(刁石京), 국가개발은행 부총재 런카이(任凯) 등 수많은 고위 인사들이 연이어 구속됐다. 이들은 투자 결정 과정에서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고 개인적 이익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스캔들은 중국 반도체 굴기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냈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투자가 반드시 기술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투명성과 견제 장치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부패와 비효율의 온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 노력은 확실히 진지하고 집요하다. 하지만 그 성격을 들여다보면 '공세적 반격'이라기보다는 '방어적 대응'에 가깝다. 미국의 기술 봉쇄에 대한 불가피한 자구책에 가까워 보인다.
현재 중국이 달성한 반도체 기술 수준은 분명 괄목할 만하다. 하지만 여전히 핵심 영역에서는 해외 의존도가 높다. SMIC의 14나노미터 공정도 ASML의 DUV 노광장비 없이는 불가능하고, 중국의 AI 칩들도 대부분 TSMC에서 위탁 생산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비록 제약이 많고 한계가 명확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기술 봉쇄가 계속되는 한, 중국은 자력갱생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CPU, GPU를 넘어 AI 시대의 새로운 연산 패러다임을 누가 먼저 장악하느냐가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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