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핵심은 단 하나의 약속이었다. "당신들의 일자리를 되찾아주겠다." 문 닫힌 공장들이 즐비한 오하이오와 미시간, 펜실베이니아의 쇠락한 공업 도시들에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처 입은 공동체에 대한 보상의 약속이자, 잃어버린 자존심의 회복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관세는 과연 약속대로 미국 제조업을 부활시켰을까? 답은 복잡하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환상
2018년부터 트럼프 행정부가 단행한 관세 정책의 규모는 전례가 없었다.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전면적 관세를 시작으로, 중국산 상품 3,500억 달러어치에 최대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러스트 벨트의 핵심 산업인 철강과 자동차 부품 분야에서 기대감은 컸다.
미국 철강협회는 관세 덕분에 공장 가동률이 80%에서 85%로 늘고, 고용도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연방준비제도의 데이터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철강 산업 고용은 6%, 알루미늄 산업은 5% 증가했다. 수치만 보면 성공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체 그림은 달랐다.
하버드대학교와 UC데이비스 공동 연구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철강·알루미늄 산업에서 직접 창출된 일자리는 약 1,000개에 불과했다. 반면 관세로 인해 원자재 비용이 급등한 자동차, 기계, 건설장비 제조업체들에서는 75,000개의 일자리가 손실되었다. 캐터필러(Caterpillar)는 2018년 실적 발표에서 "관세로 인한 추가 비용이 연간 1억~2억 달러에 달한다"며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경제정책연구소(EPI)는 2020년 보고서에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일부 원자재 산업을 보호했지만, 공급망 전반에 걸친 고비용 구조를 초래해 순고용 효과는 사실상 마이너스"라고 결론지었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 연구에 따르면 트럼프의 철강 관세가 일자리 하나를 구하거나 창출하는 데 연간 9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들었다. 관세는 하나의 산업을 살리기 위해 열 개의 산업을 희생시키는 정책이었다.
러스트 벨트의 착각과 현실
오하이오,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 러스트 벨트 핵심 주의 실제 고용 지표를 들여다보면,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제조업 부흥을 이끌었다고 보기 어렵다.
상징적인 사례가 2019년 3월 GM의 오하이오 로즈타운 공장 폐쇄였다. 1966년부터 운영되던 이 공장은 한때 5,000명을 고용했지만, GM은 결국 생산 라인을 멕시코로 이전했다. 특히 아이러니한 것은 GM이 로즈타운 공장 폐쇄를 발표한 같은 날, 새로운 쉐보레 블레이저를 멕시코 라모스 아리즈페 공장에서 생산한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지만, GM은 "높아진 생산 원가와 변화하는 시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를 들었다.
이는 21세기 제조업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대의 산업은 더 이상 단순한 '물리적 생산'이 중심이 아니다. 자동화, 기술 집약, 글로벌 공급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성공하려면 혁신 생태계의 조성이 핵심이다. 트럼프의 관세는 이런 구조적 변화를 간과한 채 과거의 향수에만 기댔다.
미시간 대학의 산업경제학자 수전 헬퍼 교수는 "관세는 20세기 해법으로 21세기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전형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러스트 벨트가 필요로 했던 것은 보호막이 아니라 변화의 동력이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중소기업이었다
러스트 벨트의 또 다른 진실은 이 지역이 단지 철강과 자동차만의 터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외국무역협회(FTA) 조사에 따르면 러스트 벨트 중소 제조업체의 상당수가 외국산 부품과 원자재에 의존하며 생존하고 있었다. 트럼프의 관세는 역설적으로 이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타격이었다.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의 한 가정용 금속 제품 업체 사장은 "중국산 철강 부품에 25% 관세가 붙으면서 우리 수익률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토로했다. "직원 12명 중 4명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작은 회사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공급업체를 바꿀 수 있겠나?"
펜실베이니아의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는 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중국산 원자재 의존도가 60%에 달했던 이 회사는 관세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공장 문을 닫았다. 50년 역사의 가족 기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이런 기업들은 '글로벌화의 희생자'라기보다, 오히려 그 체제 속에서 생존 전략을 구축해온 주체들이었다. 외국무역지구법(FTZ)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 중소 제조업체의 60% 이상이 수입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었다. 관세는 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가장 먼저 무너뜨렸다.
정치적 상징과 정책 효과의 괴리
결국 트럼프의 제조업 부활 담론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 정치적 상징에 가까웠다. 러스트 벨트 유권자들에게 관세는 '미국이 다시 자기편이라는 신호'였다. 그 약속은 실효보다 감정의 언어로 전달되었고, 2016년 대선에서는 그 감정적 어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20년 대선 즈음엔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19로 인한 대량 실업과 공장 폐쇄 사태를 겪으면서, 관세 정책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농업 보조금을 대폭 확대하고 '미국 우선주의'를 외쳤지만, 무역 적자는 줄어들지 않았고 제조업 고용도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미국 상무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308억 달러였다. 이는 관세 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2017년($375억 달러)보다는 감소했지만, 이는 주로 코로나19로 인한 전반적인 무역 감소 때문이었다. 감정적 구호의 뒤에는 여전히 녹슬어가는 공장 부지들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Made in America'의 허상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일부 철강 업계에 단기적 호황을 가져다줬을지 모르지만, 러스트 벨트 전체를 되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Made in America'라는 구호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였지만, 그것이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고용 창출로 이어지기엔 너무 단순했다.
21세기 제조업 부흥을 위해서는 관세라는 방어막보다 교육, 연구개발, 인프라, 규제 혁신을 아우르는 통합적 산업 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이나 일본의 소사이어티 5.0 같은 미래 지향적 비전 없이는, 아무리 높은 관세 장벽을 쌓아도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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