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라캉과 정신의학

엘노스 2025. 6. 11. 10:55

 

<라캉과 정신의학>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과 20세기 정신의학 간의 긴장과 교차를 심층적으로 탐구한 저작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미셸 토르는 이 책을 통해 정신병리학이라는 진단 체계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라캉의 사유를 통해 정신의학의 언어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책은 정신분석이 단순한 임상 기법이 아니라, 언어와 무의식을 매개로 한 철학적-비판적 사유임을 명확히 드러내며, 라캉의 텍스트를 실천적 맥락에서 재조명한다.

정신의학의 언어와 '실재의 삭제'

책의 전반부는 정신의학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예리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미셸 토르는 현대 정신의학이 임상적 관찰과 진단 기준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언어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 생물학적 정신의학이 패러다임을 장악하면서, 증상은 단순히 '신경전달물질의 이상'이나 '행동의 편차'로 환원되었고, 그 과정에서 주체는 실질적으로 삭제되었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제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접근에 맞서 라캉은 증상을 언어적 구조의 산물로 파악했다. 증상은 단순한 기능적 오류가 아니라, 무의식의 기표가 구체화된 형식이며, 주체가 상징계 안에서 경험하는 구조적 난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환자는 단지 이상 행동을 보이는 객체가 아니라, 말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바로 그 언어적 결핍과 왜곡이 증상으로 현현한다. 토르는 이 대립 구도를 통해 정신의학적 담론과 정신분석적 담론의 근본적 차이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라캉의 개입: 주체의 귀환과 구조의 재발견

토르는 라캉이 정신의학 담론 속에 '주체'를 되돌려놓으려 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때의 주체는 근대 철학에서 상정하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가 아니다. 라캉에게 주체란 언제나 분할되어 있으며, 무의식의 기표 체계 속에서만 존재 가능한 결여의 존재다.

책은 특히 라캉이 재정립한 정신병의 개념에 주목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기본 틀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적 정신의학의 범주(조현병, 망상장애, 신경증 등)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상징계의 실패라는 구조적 조건에서 정신병을 새롭게 정의했다. 핵심적인 예로, '아버지의 이름'이 상징계에서 배제된 경우, 주체는 타자의 언어 체계에 정상적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실재와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제시한 '정신병 구조'의 메커니즘이다.

토르는 이러한 이론적 틀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메타포적인 분석에 그치지 않고, 실제 임상에서 환자의 말하기 방식—말의 틈새, 응답의 실패, 기표의 왜곡과 치환—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실천적 도구가 된다고 강조한다. 즉 라캉의 정신분석은 기존의 진단 체계에 균열을 내는 비판적 도구인 동시에, 임상의 새로운 언어적 실천이기도 하다.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의 정치적 간극

책의 후반부는 정신의학이 어떻게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시각적 질서, 즉 관찰과 기록의 논리로 경도되어왔는지를 신 랄하게 비판한다. 이에 반해 라캉은 '말해지는 것'—더 정확히는 '말해지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분석을 구성한다. 이 지점에서 정신의학은 주체를 환자라는 고정된 객체로 위치짓고, 정신분석은 주체를 언어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존재로 파악한다.

토르는 정신의학이 임상적 권위를 전제로 환자의 주관적 진술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고 삭제하는 반면, 정신분석은 바로 그 삭제된 자리를 다시 열어젖히는 작업이라고 통찰한다. 말의 균열, 침묵, 과잉, 반복—이 모든 언어적 현상들이 분석의 진정한 자료이며, 이를 통해 주체는 자신의 욕망과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이 대목에서 『라캉과 정신의학』은 단순한 이론서를 넘어서, 현대 정신의학과 임상 실천의 정치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서가 된다. DSM이나 ICD 같은 표준화된 진단 체계가 언어적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제거하고, 환자를 수치화와 분류의 객체로 정렬하려는 흐름 속에서, 정신분석은 그 정반대의 실천으로 위치한다.

번역의 성취와 독해의 요구

민음사 판 <라캉과 정신의학>은 프랑스 원문 특유의 논리적 압축과 개념적 응축을 비교적 안정된 문체로 옮기려는 세심한 노력을 보여준다. 옮긴이 김석영은 과도한 해설을 지양하되, 주해와 개념어 해석은 신중하게 정리하여 이론적 배경을 갖춘 독자라면 무리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다만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전통을 동시에 횡단하고 있어, 각각의 이론적 배경에 대한 선이해가 부족하면 중반 이후부터 서술이 상당히 난해해질 수 있다. 이 책은 입문서라기보다는 중급 이상의 독해력을 요구하는 철학-임상 비평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만큼, 라캉의 분석적 언어가 '정신병리학의 권력'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저작이다.

사라진 주체를 되찾는 실천

정신의학은 환자를 진단하지만, 정신분석은 환자를 말하게 만든다. 『라캉과 정신의학』은 이 두 실천 사이의 긴장을 세밀하게 따라가며, 병리를 다시 말할 수 있는 언어적 공간을 열어준다. 만약 사라진 주체를 되불러들이는 것이 라캉 이론의 정치적 실천이라면, 이 책은 그 실천을 위한 정교한 지도이자 나침반이다.

토르의 작업은 단순히 라캉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 정신의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정신분석의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한다. 특히 주체의 언어적 구성과 증상의 구조적 성격에 대한 그의 분석은, 정신건강 담론이 점점 더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진단 중심주의로 경도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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