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세일즈맨의 죽음 – 윌리 로먼, 무너지는 신화

엘노스 2025. 5. 29. 16:55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윌리 로먼이라는 평범한 가장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식 성공 신화의 허상을 고발한 대표적인 현대 희곡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히 사회 비판적 메시지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윌리라는 인물이 갖는 복잡한 내면과 그가 겪는 자아의 균열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현실 – 집이라는 극장

 

이 소설은 대부분 윌리의 집 안에서 진행된다. 익숙하고 안전해야 할 공간은 점차 그의 기억과 환상, 망상까지 뒤섞인 무대로 변해간다.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자주 겹쳐진다. 이는 윌리의 내면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장치다. 그가 과거의 성공한 자신과 아들들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점점 더 그 환상이 현실과 어긋나고 있음을 느낀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덫


윌리는 자기 삶의 의미를 ‘성공’이라는 잣대 하나로 평가한다. 그는 ‘인기’가 전부라고 믿으며, 그 신념을 아들들에게도 강요한다. 하지만 그가 믿던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변했고, 윌리는 더 이상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운 잔재일 뿐이다. 그의 고통은 단지 실패해서가 아니라, 실패한 자신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깊어진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중심에는 실패한 개인으로서의 윌리가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윌리 한 사람의 몰락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가 남긴 세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 그의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의 잔해도 이 희곡의 중요한 축이다.

 

비프와 해피 –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윌리의 아들 비프는 아버지의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한때는 ‘가장 유망한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위선과 허영을 목격한 뒤로는 의욕을 잃고 목적 없는 삶을 살아간다. 비프는 마지막에 이르러 '나는 보통 사람일 뿐'이라는 자각을 하며 자기 위치를 받아들이려 한다. 이는 아버지의 거짓된 신화를 벗어나는 과정이자, 진정한 자아 회복의 첫걸음이다.

 

반면 해피는 여전히 윌리의 헛된 신념을 이어받으려 한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겉만 화려한 성공을 좇는다. 비극은 반복될 것이라는 암시가 이 인물의 태도에 담겨 있다.

 

죽음을 통한 해방, 혹은 착각

 

윌리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보험금으로 가족에게 ‘무언가 남기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선택이지만, 그 죽음조차도 세상이 그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윌리는 끝까지 자신의 삶을 ‘값어치’라는 기준으로만 평가한 셈이다.

 

우리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비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지금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유는, 윌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단면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위해, 꿈을 위해 살아간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며 살아간다. 이 작품은 그런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꿈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꿈은, 진짜 우리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