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스탈린은 왜 민족을 열차에 실어 보냈을까

레스프리 2026. 7. 14. 05:09

민족은 믿는 자에게만 존재한다지만, 국가는 그 믿음을 배신으로 규정할 권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체첸과 잉구시의 마을들에 소련군 트럭이 들어왔습니다. 주민들은 몇 시간 안에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고,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향했습니다. 같은 시기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들, 볼가강 유역의 독일계 주민들, 그리고 1937년에는 이미 소련 극동의 고려인 전체가 같은 방식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들의 죄목은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특정한 혈통이었습니다. 이송 과정과 정착 초기의 열악한 조건으로 인한 체첸·잉구시인 사망률은 소련 공식 통계로도 20퍼센트대에 달했고, 독립 연구자들의 추정은 많게는 인구의 절반에 이릅니다.

소련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연대를 국시로 내걸었던 나라입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었고, 레닌에게 민족자결권은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전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국제주의를 내세운 스탈린이 특정 민족 전체를 유죄로 규정해 열차에 실어 보냈습니다. 대외적으로 소련은 끝까지 계급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폴란드나 헝가리로 진주한 붉은군대는 민족 해방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대내적으로 소련은 철저히 혈통의 언어로 움직였습니다. 전시 부역 가능성이라는 명목 아래, 재판도 개별 심사도 없이 민족 단위로 형벌이 부과되었습니다. 국제주의라는 간판 아래에서도 민족이라는 범주는 사라지지 않고 실무의 언어로 계속 작동했다는 사실은, 민족이 계급이라는 이념적 잣대로 완전히 흡수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별개의 층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같은 시기 나치 독일도 열차로 유대인과 집시, 폴란드인을 실어 날랐습니다. 귀속적 정체성만으로 한 인구 집단 전체를 유죄로 규정하고 국가 인프라를 동원해 이송했다는 점에서 두 정권의 방법론은 닮았지만, 나치의 이송이 애초에 살해를 목적으로 설계된 경로였던 반면 소련의 추방은 통제와 배제를 위한 강제 이주였다는 점에서 목적 자체는 갈립니다. 다만 크림타타르 추방처럼 이 구분조차 학계에서 다투어지는 경계 사례가 있다는 점은 짚어둘 만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소련이 소수민족을 격리하던 바로 그 시기에, 다수민족인 러시아인의 민족감정은 정반대 방향으로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의 선전은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를 뒤로 물리고 "어머니 조국이 부른다"는 문구와 함께 알렉산드르 넵스키, 표트르 대제, 수보로프 같은 제정 러시아의 민족 영웅들을 불러냈습니다. 무신론을 국시로 탄압해오던 러시아 정교회에는 지원을 약속하며 탄압을 완화했고, 1944년에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노래였던 인터내셔널가를 대신해 "위대한 루스가 영원히 결합했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새 국가를 제정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단순한 러시아 배외주의로의 회귀는 아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소련은 여전히 다민족 인민의 단결이라는 외피를 유지했고, 그 외피 속에 제정 러시아의 유산을 체제 존립을 위한 도구로 끌어들인 쪽에 가까웠습니다. 계급투쟁의 논리로는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조국, 영웅, 신앙, 혈통은 명제가 아니라 정서를 겨냥한 언어였고, 소련은 체제 존립의 위기 앞에서 이성적 이념 대신 바로 이 언어를 택했습니다.

이 전환은 사실 근대 민족주의 자체가 걸어온 길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중세 이전까지 개인과 공동체를 궁극의 헌신으로 묶어세우던 언어는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개인의 유한성을 감싸 안고 공동체의 영속성으로 이어붙여주던 것은 교회와 신성한 왕조였습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지적했듯, 근대에 들어 이 종교 공동체와 왕조적 권위가 쇠퇴하자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이 민족이었습니다. 민족은 신의 이름을 대신해 '어머니 조국'과 고대의 영웅들을 불러냈고, 개인의 유한한 삶을 민족이라는 서사 속에 이어붙임으로써 종교가 하던 실존적 위로의 기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소련이 정교회 탄압을 완화하면서 동시에 넵스키와 표트르 대제를 불러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종교가 비워둔 그 정서적 자리를 민족이 정확히 이어받는 순간이었던 셈입니다.

소수민족은 혈통을 이유로 추방하면서 다수민족은 혈통을 이유로 결속시킨 셈입니다.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둘은 서로 다른 것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추방이 범주로서의 민족이 계급에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동원은 그 범주가 정서와 귀속감의 언어로만 온전히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확고했던 정권조차, 체제의 존립이 걸린 위기의 순간에는 프롤레타리아 연대가 아니라 '어머니 조국'이라는 훨씬 오래되고 훨씬 정서적인 언어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는 민족주의가 단지 좌우의 잣대로 잴 수 없는 범주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애초에 이성적 이념 체계가 아니라 정서와 귀속감에 뿌리를 둔 별개의 층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층위는 국가가 위기 속에서 꺼내 드는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탈식민 아시아를 이끈 지도자들 개인의 사상으로 내려가 보면, 확고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조차 이 층위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사회주의에 입문했으며, 1923년 모스크바로 건너가 농민인터내셔널(크레스틴테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핵심부에 있었습니다. 반면 수카르노는 유럽 유학이나 외유 없이 반둥 기술연구소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며 식민지 본토 안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했고, 독립운동을 이유로 네덜란드 식민 당국에 체포되어 플로레스섬의 엔데, 이후 수마트라의 븡쿨루로 거듭 유배되었습니다. 국제 공산주의 네트워크 속에서 단련된 인물과, 식민지 본토 안에서 투옥과 유배를 거듭하며 다져진 인물이라는 이 대비는, 두 사람이 훗날 걷게 될 길의 차이를 이미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호치민은 이념적으로는 확고한 레닌주의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1960년 레닌 탄생일에 즈음해 당 기관지에 쓴 글에서 스스로 밝힌 바는 뜻밖입니다. 그는 자신을 혁명으로 이끈 것이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론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억압받는 민족과 세계 노동자를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즉 그에게 공산주의는 민족 해방이라는 먼저 있던 정서적 헌신을 실현하기 위해 나중에 선택한 수단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골수 공산주의자조차 민족이라는 층위를 이념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위에 이념을 얹어야 했던 셈입니다.

수카르노는 반대 방향에서 같은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는 민족주의(나시오날리스메), 종교(아가마), 공산주의(코무니스메)를 나란히 세운 '나사콤' 체제를 구상했는데, 이는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를 갈라놓던 세속 민족주의, 이슬람 전통 세력, 급성장하는 공산당이라는 세 축을 인도네시아 고유의 정체성인 빤짜실라 위에서 통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가 민족주의를 좌파(공산주의)나 우파(전통 종교 세력)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포섭시키지 않고 별도의 독립된 기둥으로 세워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민족주의가 단지 좌우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이었다면 세 개의 기둥이 아니라 두 개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좌우의 잣대로 잴 수 없는 범주 오류라는 1편의 결론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국가 단위의 위기에서든 개인 사상가의 내면에서든, 민족은 이성적 이념 체계에 완전히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그 아래 혹은 그 곁에서 별도로 작동했습니다. 이것이 민족이 이념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시대를 초월해 불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민족은 종교 공동체가 물러난 자리를 근대에 들어 이어받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구성물입니다. 다만 무엇을 이어받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체제와 개인이 가장 절박한 순간에 기대야 했던 층위는 한때 신의 이름이 차지했던 바로 그 층위였고, 그런 이유로 그 층위는 명제가 아니라 정서와 귀속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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