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이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제국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수십 척의 전함으로 대서양과 지중해를 지배하던 영국 해군이, 노후한 고정포대와 구식 화포로 무장한 해안 요새를 뚫지 못해 수십만 명의 젊은이를 반도의 참호에 묻어야 했습니다. 오스만의 요새 자체는 낡았지만, 그 약점을 메운 것은 독일 고문단의 배치 조언과 이동식 곡사포의 은폐 운용이었습니다. 갈리폴리는 힘의 우열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입니다.
1915년 초, 서부전선은 참호전의 지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마른 강 전투 이후 양측은 각자의 참호선 뒤에서 서로를 소진시키는 소모전에 들어갔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교착을 우회할 방법을 찾던 영국의 시선이 향한 곳은 동쪽이었습니다. 러시아는 탄넨베르크와 마주리안 호수에서 참패한 뒤 탄약과 병력 모두 부족한 상태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압박을 견디고 있었죠. 문제는 러시아를 지원할 통로가 마땅치 않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스만이 전쟁에 뛰어들며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봉쇄했고, 흑해를 통한 보급선이 끊긴 러시아는 아르한겔스크의 결빙항이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라는 비효율적 우회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해협을 뚫어 러시아에 물자를 대고 오스만을 전선에서 이탈시킬 수 있다면 전쟁의 판도 자체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전략적 필요성에 개인의 야심이 더해졌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1911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해군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례적으로 빠른 초고속 승진이었고, 그만큼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서부전선이 교착되고 로열네비가 결정적으로 기여할 길이 보이지 않던 시점에, 다르다넬스는 해군 단독으로 전쟁을 역전시킬 수 있는 극적인 기회로 보였죠. 애스퀴스 수상과 키치너 육군장관은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이 구상을 전시내각의 의제로 끌어올리고 관철시킨 것은 처칠의 추진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칠이 실제로 넘어야 했던 반대는 해군 내부에서 나온 근본적인 이의였습니다. 제1해군경 존 피셔는 전함을 육지의 요새포와 맞세우는 발상 자체에 반대했습니다. 처칠은 이 반대를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취급했고, 결국 밀어붙였습니다. 피셔는 작전이 실패한 뒤 1915년 5월 사임했습니다. 자유당 단독 내각이던 애스퀴스 정부가 연립내각으로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고, 처칠 본인도 해군장관에서 경질되었습니다. 갈리폴리의 실패는 야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런던의 정치 지형까지 바꿔놓았습니다.
갈리폴리 반도는 괜히 천연의 요새로 불린 것이 아닙니다. 좁고 가파른 절벽이 해안선 바로 뒤에서 시작해 고지대로 이어지는 지형은 상륙 가능한 지점을 극소수로 제한합니다.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가장 좁은 내로우즈 구간은 폭이 2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고, 양안의 요새포가 이 좁은 물길을 협공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게다가 해협의 표면 해류는 마르마라해에서 에게해 쪽으로 강하게 흘렀습니다.
기뢰야말로 첫 번째 장벽이었습니다. 기뢰를 걷어내야 전함이 내로우즈로 진입할 수 있었는데, 소해정 대부분은 개조된 어선에 불과했고 이들이 야간에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 작업하는 동안 능선 뒤에 배치된 오스만의 이동식 곡사포가 이를 저지했습니다. 함포는 대함전에 최적화된 평사포 체계였던 탓에 이런 은폐 표적을 직접 조준해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소해정이 곡사포에 격퇴당해 기뢰를 치우지 못했고, 기뢰가 남아 있는 한 전함은 해안선에 근접해 포대를 제압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피셔가 우려했던 바로 가라앉지 않는 요새 앞의 함대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1915년 3월 18일의 함대 공격에서 프랑스 전함 부베함과 영국 전함 오션함, 이레지스터블함이 기뢰로 침몰하고, 인플렉서블함마저 기뢰에 손상을 입어 예인되며 전열에서 이탈했습니다.
함대 사령관 존 드 로벡은 전열의 절반이 무력화된 것을 보고 함대를 철수시켰지만, 처칠은 여전히 전함 열네 척이 온전하고 내로우즈 돌파가 눈앞이라 믿으며 공격 재개를 압박했습니다. 드 로벡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3월 22일 퀸엘리자베스함 회의에서 그는 해군 단독으로는 다르다넬스를 뚫을 수 없으며, 해안 포대를 무력화하려면 대규모 지상군이 먼저 상륙해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처칠의 야심과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 정면으로 충돌한 지점이었고, 이번에는 현장이 이겼습니다. 해군 단독 돌파라는 구상은 이 순간 사실상 끝났습니다.
육군이 상륙 준비를 갖추는 한 달 동안, 오스만과 독일 고문단은 갈리폴리 반도의 방어를 재편할 여유를 얻었습니다. 해군의 실패는 육군 투입이라는 차선책으로 이어졌지만, 이미 기습의 이점을 잃은 후였습니다. 게다가 영국은 전통적으로 해양 패권을 통해 대륙 개입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해온 나라였고, 상비 육군의 규모는 대륙 열강에 비해 작았습니다. 1915년 초 영국 원정군은 이미 서부전선에 수십만 병력을 투입해 소모전을 벌이고 있었고, 신설된 뉴아미(New Army)조차 훈련과 장비가 미비해 전선에 온전히 투입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갈리폴리에 대규모 병력을 추가로 배정하는 것은 키치너의 입장에서 감당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소극성은 처칠과의 개인적 알력이 아니라, 영국이 애초에 두 개의 대규모 지상전을 동시에 치를 육군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구조적 제약에 대한 합리적 반응이었습니다. 결국 상륙군은 만성적인 병력과 화력 부족에 시달렸고, 해군 작전 실패로 이미 기습의 이점까지 상실한 채로 전장에 투입됐습니다.
여기에 상륙 지점을 둘러싼 혼선까지 더해졌습니다. 이안 해밀턴이 지휘한 상륙작전에서 호주/뉴질랜드 군인들로 구성된 연합군은 애초 계획했던 브라이턴 비치가 아니라, 그보다 북쪽의 좁고 절벽으로 가로막힌 지점에 상륙했습니다. 오랫동안 이는 해류와 어둠이 겹쳐 빚어진 항해상의 실수로 설명돼 왔지만, 정말 실수였는지를 두고 역사가들 사이에 백년 넘게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목표 지점이었던 가바테페는 오스만군 포대가 밀집한 곳이었고, 실제 상륙 지점은 지형은 험했지만 오히려 직사포화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병력이 좁은 해변에 갇힌 채 고지를 선점한 오스만군의 사격에 노출됐고, 이후 몇 달간 이 협소한 교두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오스만군의 방어선 재편에는 독일이 파견한 리만 폰 잔더스의 군사고문단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고, 이들은 상륙 예상 지점을 정확히 판단해 방어를 강화해 두었습니다. 영국이 상대한 것은 순수한 오스만 단독의 전력이 아니라, 독일의 군사적 조언이 더해진 재편된 방어 체계였습니다. 연합군의 상륙 당일 현장에서 즉각적인 반격을 지휘해 교두보 확장을 저지한 것은 훗날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무스타파 케말이었습니다. 그의 신속한 판단과 현장 통솔력이 없었다면 오스만군의 방어선이 그토록 견고하게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교두보에 갇힌 뒤부터가 진짜 전쟁이었습니다. 4월 25일 상륙 이후 전선은 서부전선의 축소판처럼 굳어졌습니다. 좁은 해변에서 시작된 참호선이 능선을 따라 몇백 미터씩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고, 양측 모두 정면 돌격과 백병전으로 병력을 소진시켰습니다. 6월 초 헬레스 지역의 3차 크리티아 전투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연합군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정면공격을 감행했지만 중앙의 사단을 제외한 부대들이 실패하며 막대한 사상자를 냈고, 오스만군 또한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8월 수블라 만 상륙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교착을 풀지 못한 채 또 다른 참호선을 하나 더 만드는 데 그쳤습니다.
오스만군의 사정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병참이 만성적으로 부족해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채 2만 발이 되지 않는 포탄으로 버텨야 했고, 정면공격이 번번이 실패하자 참호를 파고 지뢰를 심는 소모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측 모두 상대를 무너뜨릴 결정타를 만들지 못한 채 여름 내내 서로를 갉아먹었습니다.
8개월간 이어진 이 소모전의 최종 청구서는 상륙 실패 자체보다 훨씬 컸습니다. 협상국과 오스만 제국 양측에서 각 25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상당수가 참호와 고지 쟁탈전에서 나온 손실이었습니다. 병력 대비로 보면 더 참혹합니다. 연합군은 투입 병력 57만 명 가운데 30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오스만군도 32만 명 중 25만 명이 사상자였다는 집계가 있을 만큼, 이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병력의 절반 이상을 갈아 넣은 소모전이었습니다. 오스만군 개별 부대의 피해도 극심했고, 이 전쟁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아니라 양측 모두를 탈진시킨 소모전이었습니다.
해협을 뚫어 러시아를 지원하고 오스만을 전선에서 이탈시킨다는 전략적 판단은 그 자체로는 타당했습니다. 처칠이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해결해야 했던 장애물이었습니다. 기뢰와 곡사포가 맞물린 물리적 제약, 그 뒤를 받쳐줄 육군의 여력, 그리고 무엇보다 피셔가 지적했던 기술적 불가능성이었습니다. 3월의 함대 공격 실패는 이 간극이 처음 드러난 순간이었을 뿐, 진짜 대가는 그 뒤 여덟 달의 참호전에서 지불됐습니다. 갈리폴리가 남긴 교훈은 목표와 수단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 계획은 압도적인 물리력조차 무력화시키며,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가 계속될수록 대가는 초기 실패의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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