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본과 협상한 진보의 초상

레스프리 2026. 7. 6. 17:40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정당이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면, 그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국의 더불어민주당과 미국의 민주당은 자유주의라는 계보를 함께 자임하고, 노동과 복지와 남북관계라는 의제에서 나란히 진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그러나 경제와 안보라는 가장 단단한 두 축을 놓고 두 정당을 나란히 세워보면, 이들은 같은 이름 아래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역설은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반대 방향으로 갈라진 두 정당이, 놀랍게도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정치의 좌우는 정부가 시장에 얼마나 개입하는가, 그리고 낙태와 총기와 인종이라는 문화적 균열을 어느 편에서 바라보는가로 그어집니다. 한국 정치의 좌우는 다른 지반 위에 서 있습니다. 분단이라는 조건과 독재 대 민주화라는 역사가 이 나라의 이념 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대북 유화 정책을 좌파의 표지로 읽는 것은 흔한 오류입니다. 계급 갈등에서 출발한 서구의 좌파 개념과,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나온 통일 지향성은 본래 다른 뿌리를 가집니다. 해방 직후 가장 강경한 통일 지상주의를 펼쳤던 것이 오히려 우익 진영의 김구 계열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대북정책만으로 한 정당의 좌우를 규정하는 일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반 위에서 실제 정책을 겹쳐보면 그림이 뚜렷해집니다. 김대중 정부가 내세운 것은 시장경제의 부정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성장이었고, 노무현 정부는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미 FTA를 밀어붙였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재편을 요구하기보다 그 틀 안에서 효율을 추구했던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과 정확히 같은 궤도 위에 있습니다. 반면 미국 민주당은 오바마케어의 확대, 최저임금 인상 운동, 최근의 산업정책까지 재정 개입에 훨씬 적극적이었습니다. 안보에서도 같은 역전이 일어납니다. 한국 민주당 정부들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국방비를 증액하며 자주국방을 강조했고, 이라크 파병이라는 동맹 우선의 선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민주당이 대체로 다자주의와 외교적 해법을 선호해온 것과 비교하면, 한국 민주당의 안보관은 훨씬 현실주의적인 색채를 띱니다. 다만 이를 곧바로 미국 공화당의 문법과 겹쳐 읽는 것은 성급합니다. 공화당의 안보관이 고립주의와 일방주의를 오가는 것과 달리, 한국 민주당의 자주국방은 한미동맹이라는 틀 자체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작전통제권 환수와 독자 억지력을 추구하는, 결이 다른 현실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당은 왜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두 나라의 진보정당이 각자의 자본 권력과 맺어온 관계가 드러납니다. 한국에서는 재벌이, 미국에서는 월가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재벌은 고용과 수출이라는 실물경제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 이들과의 충돌은 곧바로 경기 지표에 새겨집니다. 노무현 정부 초기의 재벌 개혁 시도가 관료제와 언론과 경제단체의 저항 앞에서 후퇴한 일은 이 구조적 제약을 잘 보여줍니다.

미국에서는 1992년 클린턴의 민주당지도부협의회 노선이 뉴딜 연합에서 월가와 실리콘밸리로 지지 기반의 무게중심을 옮겼고, 그 결과가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제약이 단지 일시적 타협이었다면, 거부권이 사라진 순간에는 억눌렸던 의제가 터져 나왔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회 백팔십 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을 쥐고도 재벌의 지배구조나 노동권을 획기적으로 손대지 않았고, 정치적 자원은 부동산과 검찰개혁으로 흘러갔습니다. 오바마 정부 역시 하원 다수와 상원 필리버스터 저지선까지 확보했던 이천구년과 이천십년, 대형 은행의 해체나 경영진의 형사 기소 대신 도드-프랭크법이라는 온건한 규제로 만족했습니다. 거부권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급진적 선택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단순한 힘의 제약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내면화된 엘리트의 선호였음을 말해줍니다. 제약 때문에 못한 것이 아니라, 제약이 오래 지속되며 애초에 다른 대안을 진지하게 상상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물론 두 사례를 완전히 겹쳐놓을 수는 없습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월가는 시스템 리스크라는 추상적 논리로 움직이는 다수의 행위자들이고, 재벌은 소수의 거대한 실물 권력입니다. 이 차이는 두 나라의 온건화가 같은 속도나 같은 형태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더구나 최근의 흐름은 이 수렴을 다시 흔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인플레이션감축법과 인프라법, 학자금 대출 탕감 같은 조치를 통해 클린턴 시절의 긴축적 균형 재정과는 다른 방향으로, 국가가 산업과 재정에 직접 개입하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월가와의 결별로 읽는 것은 성급합니다. 규제된 것은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특정 전략 산업에 대한 지원의 방향이지, 글래스-스티걸 법의 부활 같은 금융 자본 자체에 대한 통제로 되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재정 국가주의로의 부분적 이동과 월가와의 근본적 결별은 다른 사건입니다. 반면 한국 민주당은 종합부동산세와 금융투자소득세를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 여전히 세제 완화의 압박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비대칭이 앞으로 두 정당의 궤적을 다시 갈라놓을지, 아니면 일시적인 이탈에 그칠지는 좀 더 지켜볼 문제입니다.

결국 한국 민주당의 우편향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무대에서만 벌어진 이례적 사건이 아닙니다. 탈산업화 시대의 진보정당이 자본과 오래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무게중심 자체를 옮게 되는, 더 넓은 패턴의 한국적 판본에 가깝습니다. 이름은 같았지만 각자의 대륙에서 각자의 자본과 협상한 결과, 두 민주당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곳으로 수렴했습니다. 진보의 언어를 쥐고 있으면서 보수의 정책을 실행하는 정당, 그것이 이 시대 진보정당의 가장 흔한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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