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M 밴드를 중심으로 스타디움/아레나 급의 아티스트가 국내외에서 참가한 마지막 날의 마린 스테이지. 바로 앞의 순서에 출연한 Perfume의 노아 짱이 "자, 다음은 블랙핑크에요. 기대돼~!"라며 명랑하게 웃는 얼굴로 바통을 넘겨주고 드디어 8개월 만에 일본을 방문한 블랙핑크가 서머 소닉에 처음 등장한다.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지만, 2019년 블랙핑크의 활약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올해 1 월에 리사의 고향 태국 방콕에서 ‘BLACKPINK WORLD TOUR IN YOUR AREA’를 시작해 다음 달에는 ‘더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 베어’라든가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미국 TV 데뷔를 장식하고, 4월에 2주 동안 코첼라 페스티벌에 출연. 다음은 북미, 유럽, 마카오, 호주를 도는 월드 투어를 거쳐 7월에 다시 방콕에서 3일간의 앵콜 공연을 한 직후다. 서머 소닉은 도쿄 스테이지만 출연하지만, 전날에는 ‘a-nation 2019’에서 오랜만에 일본에서의 무대를 실현했던 것으로 공연자로서 말 그대로 물이 오른 무적 모드인 것이다.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땡볕 더위 속에서 MC를 맡은 삿샤가 “밀지 마세요!”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호소할 정도로 앞열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찬 상태. 필자는 아레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2층 관람석을 확보했는데 공식 굿즈인 뿅봉을 든 블링크도 상당수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많은 팬들이 궁금해한 점이 코첼라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화제를 부른 밴드와 함께인가? 일본어 버전과 오리지널 한국어 버전 중 어떤 걸 부를 것인가 2가지일 것이다. 전자의 대답은 무대가 바뀌는 동안 곧 분명해졌고, 길 스미스 II가 이끄는 솜씨 좋은 The Band Six가 리허설에서 ‘See U Later’(본 무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의 가슴 뛰는 리프를(*주:반복되는 악절) 연주하자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가사를 따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각 15시 25분이 되자 스타디움을 뒤흔드는 박력 있는 앙상블과 함께 '킬 디스 러브' 의 티저에서 따온 오프닝 영상이 스크린에 비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지수, 제니, 로제, 리사 4명이 스테이지 중앙에 강림, 아레나가 떠나갈 듯이 큰 함성이 끓어오른다. 곡 목록은 이제 그녀들 라이브의 학습으로 익숙한 것이 되었다. '뚜두뚜두'의 일본어 버전에서 ‘블랙핑크’라는 함성을 신호로 펼쳐지는 일사불란한 댄스와 트랩 풍의 원곡을 생음악 사양으로 업그레이드한 사운드에 관객들이 봇물 터진 것처럼 춤춘다. 이어서 슬로우 템포의 문바톤 장르 '포에버 영'은 4명이 무대에 누운 채 안무로 막을 열고 아라비아풍의 요염한 멜로디로 장내는 하나가 된다. 페일 톤 위주의 a-nation 의상에 비해 서머 소닉에서는 전원이 코첼라 무대를 연상시키는 블랙 & 화이트 의상을 입은 것도 놓칠 수 없다.
사회에서는, "서머 소닉은 처음 출연하는데, 여러분 즐기고 있으신가요?"(제니), "여러분 안녕하세요!"(지수), "오늘은 다 함께 즐겨요!"(로제), "서머 소닉, WHAT's up! 오늘은 여러 곡을 준비했으니 우리 함께 끝까지 신나게 즐겨요."(리사)라고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한다. 지수의 "아는 분은 함께 불러주세요!"라는 호소와 함께 시작된 ‘스테이’는 어쿠스틱 기타를 축으로 하는 원곡과는 달리 부유감 있는 신시사이저 사운드와 애수가 감도는 일렉트릭 기타의 음색이 감성적인 음악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4번째 곡 ‘휘파람’은 리사와 제니의 스웩 있는 랩이 특징인데 B 멜로디의 ‘바람처럼 스쳐가는’ 소절을 제니가 한국어 가사 그대로 노래해버리고 웃는 귀여운 해프닝도 있었다. 그런 제니가 "아직 분위기를 살릴 수 있죠? 다음은 새 앨범의 곡입니다!"라고 말하고 최신 EP <KILL THIS LOVE>에 수록된 3개의 신곡을 잇달아 선보였다. 타이틀 곡 ‘킬 디스 러브’'는 웅장한 호른과 취주악 드럼, 보이지 않는 숏건을 쏘는 강렬한 킬링 파트, 백댄서를 거느린 압권인 포메이션 댄스, 그리고 4명의 감성적인 목소리가 대관중의 열기를 쭉쭉 끌어올린다.
작년 코첼라에서 최대 하이라이트였던 ‘비첼라’를 방불케 하는 ‘킬 디스 러브’지만, 필자는 10년 전 이곳 마린 스테이지에서 관록의 주역을 맡았던 비욘세의 무대를 기억하고 있다. 서머 소닉 20년의 역사는 페스티벌에서 여성 아티스트들의 약진, K-POP을 포함한 아시아권 음악의 활약, 록도 힙합도 메탈도 EDM도 아이돌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카오스적인 다양성, 그 모든 것을 내다보면서 우리에게 제공해왔던 도전의 20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년은 올림픽의 해라서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되었지만, 밀레니엄 2000년부터 이어진 첫 장을 마감하고 다음 단계로 전환하려는 올해 메인 스테이지에서 블랙핑크가 수만 명의 청중을 열광시키는 광경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2010년에 한발 앞서 서머 소닉에 출연한 YG의 빅뱅이 활동 중단 상태에서, 그 빅뱅을 오랫동안 서포트한 The Band Six를 데리고 그들조차 이루지 못한 코첼라 출연 등의 위업을 달성한 전인미답의 스토리.
<킬 디스 러브>에 수록된 3곡만은 오리지널 버전 그대로 노래했지만, 역시 온 신경을 퍼포먼스에 쏟은 만큼 4명의 노래와 춤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본 실력을 발휘했다. 로제의 벨벳 보이스와 지수의 하이톤 코러스가 하늘 높이 비상하는 EDM 곡 'Don't know what to do'는 제드와 체인 스모커스로 이어지는 이날 마린 스테이지 흐름에 기분 좋을 정도로 잘 맞았다.(월드 투어의 솔로 코너에서 지수가 제드의 "Clarity"를 커버하기도 했다) ‘Kick It’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방방 뛰는 후렴구의 대합창이 가져온 일체감/ 파티 느낌은 리틀 믹스와 찰리 XCX에 육박하는 빵 터지는 강도라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약 40분의 제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밴드의 연주 세션과 제니의 ‘솔로’, 게다가 두아 리파와의 콜라보 ‘Kiss and Make up’이 셋 리스트에서 제외된 것은 유감이었지만, 4명의 멤버가 무대 좌우로 흩어져 손을 흔들거나 손 키스를 보내거나 하면서 팬들을 매료시켰다. “정말 즐거워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리사)”, “우리 블랙핑크가 12월에 돔 투어를 합니다. 여러분, 꼭 와주세요!(제니)”라며 마지막 사회로 블링크와의 재회를 약속하면서 이국적인 리듬을 타고 격렬하게 춤추는 ‘붐바야’, 하우스 음악과 댄스홀 레게를 융합한 ‘마지막처럼’을 공연해, 대관중이 스타디움을 뒤흔들 정도로 뛰는 가운데 마무리.
‘BLACKPINK 2019-2020 WORLD TOUR IN YOUR AREA in JAPAN’'의 전초전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서머 소닉 첫 공연이었다. 이제 돔 투어 총 4회 공연 매진도 꿈이 아닐 것이다.
블랙핑크 그녀들은 코첼라 때와 마찬가지로 서머 소닉 공연장에서도 브록햄튼 등 다른 가수의 무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트위터에서 확산되었고, 인스타그램에서는 체인 스모커스와의 투 샷도 게시되어 있었다. 현재까지도 제니 이외의 솔로 프로젝트가 대기 중이라서 전 세계 팬들이 답답해하는 것 같지만, 2020년에는 올해의 쾌진격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하나 예언을 해두면, 내년에는 프리마 베라 사운드와 레딩 페스티벌 등 유럽/영국의 페스티벌에 출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