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니어스법의 한계

레스프리 2026. 2. 26. 07:59

미국 재무장관 베센트가 지니어스 법안을 밀어붙이며 이런 논리를 폈습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늘어나면 그만큼 미국 국채 수요가 창출되고, 재정 적자 해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거죠. 이 논리는 얼마나 현실적일까요?

전 세계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3,0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테더(USDT)와 USD코인(USDC)이 대부분을 차지하죠. 스테이블코인들은 1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발행액만큼의 미국 국채와 단기 금융 자산을 담보로 보유합니다. 그러니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커질수록 국채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죠. 문제는 그 비율과 성장의 구조적 한계입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연간 재정 적자는 2025 회계연도 기준 1조 8,000억 달러를 기록했고, 누적 국채 잔액은 2026년 초 38조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전액 국채 매입에 나선다 해도, 연간 적자의 약 16퍼센트, 누적 국채 잔액의 0.8퍼센트 미만 수준에 불과하죠. 베센트 장관 등 스테이블코인 옹호론자들은 이 시장이 향후 수조 달러 규모로 팽창해 국채를 소화해 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지만, 현실은 희망고문에 가깝습니다.

지니어스 법안은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 대한 이자 지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금리가 존재하는 머니마켓펀드(MMF)나 은행 예금을 두고, 이자가 붙지 않는 스테이블코인으로 대규모 자본을 이동시킬 경제적 동기가 희박합니다. 스테이블코인의 수요는 국경 간 송금이나 즉각적인 결제 같은 거래적 유용성에 머물 수밖에 없고, 매년 1조 달러가 넘는 이자 비용을 발생시키는 국가 부채를 흡수할 수준으로 확대되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분명합니다.

테더나 USDC 같은 발행사들은 유동성 관리를 위해 주로 만기 3개월 이하의 미국 단기 국채(T-bill)를 집중적으로 매입합니다. 스테이블코인 이용자는 언제든지 환불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발행사 입장에서는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단기물을 보유하는 것이 필요하죠.
미국 재무부는 최근 몇 년간 재정난을 메우기 위해 단기 국채 발행 비중을 크게 늘려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이 단기물 소화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직면한 재정 위기의 본질은 10년, 30년 만기 장기 국채를 안정적으로 소화하고 이자 부담을 관리하는 데 있습니다. 

의회예산처(CBO) 추산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 법안이 시행되면 향후 10년간 추가 재정 적자는 4-5조 달러 규모에 달합니다. 재정 적자가 확대될수록 미국 재무부는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많은 국채를 누가 다 사줄 것이냐는 거죠.

전통적인 대형 구매자였던 각국 중앙은행의 달러 자산 보유 비중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 70%에 육박하던 글로벌 외환보유고의 달러 비중은 현재 58~59% 수준으로 낮아졌죠. 각국 중앙 은행들이 금이나 다른 주요 통화로 포트폴리오를 분산하는 흐름입니다. 미국이 수십 년간 당연하게 여겨온 국채 수요 기반이 조용히 침식되고 있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감세로 급증하는 국채 발행량을 소화해야 하는데 구매자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성장이 단기채 수요처의 공백을 일부라도 메워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죠.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신뢰는 결국 달러 자체의 신뢰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이 USDT를 쓰는 이유는 달러로 교환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 믿음의 바탕에는 미국의 재정 건전성과 달러 패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정 위기가 더 깊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달러 약세와 미국 국채 신용 우려가 커지면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도 동반 하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이 달러에서 이탈하려는 국면이라면, 달러를 1:1로 추종하는 스테이블코인도 같은 운명을 피하기 어렵죠.

여기에 국채를 소화하려다 실물 경제의 숨통을 조이는 은행권 자금 이탈 리스크가 더해집니다. 베센트의 기대처럼 스테이블코인 시장으로 막대한 자금이 쏠린다면, 이 돈은 결국 은행 예금에서 빠져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이는 시중 은행의 자금 조달 비용을 급격히 높이고, 가계와 기업에 대한 대출 여력을 떨어뜨립니다. 단기 국채 소화라는 명분 하에 실물 경제를 지탱하는 은행 시스템의 유동성을 경색시키는 풍선 효과가 발생할 우려가 있죠.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지니어스 법안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인 또 다른 이유는 뭘까요?

여기서 SWIFT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2년 러시아 제재 이후 SWIFT 배제는 미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금융 무기로 재조명되었죠.

SWIFT의 약점은 느리고, 비싸고, 은행 계좌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반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국경을 넘어 즉시 결제됩니다. 은행 인프라가 취약한 신흥국 시장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자연스럽게 침투하면, 민간 주도의 블록체인 결제망을 통해 SWIFT 망 바깥에서도 달러 결제 생태계가 확장됩니다. 기존 제도권 밖에서 달러 유동성을 확대하는 구조가 만들어지죠.

이 전략에도 내부 모순이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 제재가 작동하는 이유는 달러 결제가 미국이 통제하는 은행 시스템, 즉 코레스 뱅킹망과 SWIFT를 경유하기 때문이죠. 은행 계좌 동결, 달러 결제 차단—이 모든 것은 중간에 미국 은행이 끼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SWIFT를 우회하는 결제 인프라가 된다면 어떨까요? 그 거래는 블록체인 위에서 이루어지고, 미국 은행은 중간에 없습니다. 실제로 유엔 전문가 패널 보고서들은 이란과 북한이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암호화폐를 제재 우회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거듭 지적해왔습니다. 달러를 쓰면서도 미국의 통제망 바깥에 존재하는 거래가 현실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죠.

미국이 달러 패권을 블록체인으로 확장하면 할수록,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금융 제재 능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미국 의회를 통과한 지니어스 법안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해 미국 정부의 자산 동결 및 거래 차단 명령에 즉각 응할 의무를 부과하고, 발행사가 직접 주소 단위로 블랙리스트를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퍼블릭 블록체인은 누구나 새 주소를 만들 수 있고, 탈중앙화 거래소(DEX)를 경유하면 추적이 극도로 어렵죠.


결국 스테이블코인이 재정 적자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진짜 해법이 모두 정치적으로 극히 어렵기 때문이죠.
재정 적자를 줄이려면 지출을 삭감하거나, 세금을 올리거나, 성장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복지 지출 삭감은 유권자 저항에 부딪히고, 증세는 공화당 정강과 충돌하고, 성장 가속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감세 연장이라는 정반대 방향을 선택하고 있죠. 적자를 줄이기는커녕 더 깊게 파면서, 그 구덩이를 메울 새로운 국채 구매자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띄우는 구조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스테이블코인이 국채를 흡수한다는 논리는 정치적으로 매력적입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죠. 트럼프가 원하는 감세도 하고, 복지도 건드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국채는 소화된다는 시나리오입니다. 실제 효과는 미미하더라도, 뭔가 하고 있다는 인상은 줄 수 있죠.

하지만, 어떤 정치적 수사로 포장하더라도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3,000억 달러로 38조 달러를 구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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