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이 해상교통로를 지키고, 안전한 바다가 달러 기반의 자유무역을 가능하게 하며, 달러 수요가 미국의 재정 여력을 만들고, 그 재정으로 다시 해군을 유지하는 선순환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작동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순환 고리의 한 축인 재정 여력에 균열이 가고 있습니다. 구조적 붕괴에 가깝죠.
2025년 9월 말 회계연도 종료 기준으로 미국의 총 국가부채는 37.6조 달러이고, 12월에는 38조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공공이 보유한 부채만 따지면 GDP의 약 100퍼센트에 해당하고, 정부 내부 보유분까지 포함한 총부채 기준으로는 GDP의 120퍼센트를 상회합니다.
진짜 문제는 이자입니다. 2025 회계연도에 미국 연방정부의 순이자 지출은 재무부 기준 9,700억 달러였고, 의회예산처(CBO)가 집계하는 더 넓은 기준으로는 1조 달러를 처음으로 돌파했습니다. 5년 전의 이자 지출이 3,450억 달러였으니까, 거의 세 배가 된 셈입니다.
이자 비용은 2025 회계연도 기준으로 사회보장지출에 이어 연방 지출의 두 번째 항목입니다. 메디케어와 국방비 모두를 넘어섰죠. 연방정부가 거둬들이는 세수 1달러 중 19센트가 과거의 빚에 대한 이자로 나갑니다.
전망은 더 암울합니다. 의회예산처는 향후 10년간(2026~2035년) 순이자 지출이 총 16조 달러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산합니다. 2026년 1조 달러에서 2035년 1.8조 달러로 76퍼센트 증가할 전망이고, 연방 예산 중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항목입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빅뷰티블빌(One Big Beautiful Bill)' 감세 효과까지 더해지면 이자 부담은 더 가파르게 늘어나겠죠.
해군력이라는 하드웨어의 유지보수 비용을 이자 지급이라는 블랙홀이 빨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셰일 혁명으로 달성한 에너지 자립은 미국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중동의 에너지 항로를 지켜야 할 경제적 이유마저 희석시키고 있죠.
재정 위기에 더해, 미국은 배를 만드는 능력 자체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중국은 1,000척 이상의 상선을 건조했지만, 같은 해 미국은 8척을 만들었습니다. 2024년 글로벌 상업 조선 시장에서 중국이 53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반면 미국의 점유율은 0.1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미 해군 정보국(ONI)의 기밀 해제 브리핑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조선 역량은 미국의 232배입니다.
현재 미국의 해군 함정 건조와 정비를 담당하는 주요 업체는 사실상 두 곳뿐이며, 둘 다 이론적 최대 용량을 초과해 가동 중입니다. 해군 수상함의 정비 적체는 심각하죠. 건조 중인 함정 45척 중 37척이 납기 지연 상태입니다.
미국의 4개 공공 조선소는 평균 61년이 넘었고, 드라이 독의 평균 연령은 107년에 달합니다. 이러한 물리적 격차를 단기간에 메울 수 없기에 미 해군은 드론과 무인 함대, 극초음속 미사일 같은 비대칭 전력으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산업 기반의 열세를 기술적 비대칭성으로 상쇄하려는 전략이죠.
트럼프는 2025년 미국 조선업 부활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한국 조선사들과의 협력과 투자 약속 등을 잇달아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분석가들은 회의적입니다. 미국 조선업의 재건은 숙련 노동력 부족이라는 근본적 제약에 직면해 있습니다. 잠수함 산업 기반 하나만 해도 향후 10년간 10만 명 이상의 숙련 인력이 필요한데, 신규 채용자의 60퍼센트가 첫 해에 이탈한다는 현실이 조선업 재건의 난이도를 말해줍니다.
재정적 여력이 줄고 배를 만들 능력도 부족하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입니다. 지키는 바다의 범위를 줄이는 거죠.
25년 2월,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전략적 현실이 미국으로 하여금 유럽의 재래식 억제력에 대한 주된 책임을 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펜타곤은 인도 태평양으로 자원을 전환하고, 다른 전구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할 것을 명시했죠.
주요 항모전단과 구축함이 유럽에서 카리브해로 재배치되었고, 나토 동부 전선에서 순환 배치 병력을 감축했습니다.
2025년 6월 24~25일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는 이런 전략적 전환을 공식화한 자리였습니다. 트럼프는 나토 동맹국들에게 GDP 5퍼센트라는 전례 없는 지출 목표를 관철시켰죠. 구체적으로는 순수 군사비 3.5퍼센트, 사이버·인프라 등 방어 관련 지출 1.5퍼센트를 합산한 수치이고, 2035년까지 달성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미국이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유럽의 방위는 유럽이 책임지라는 거죠.
유럽은 이제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서반구, 인도 태평양, 중동에 이어 4순위로 밀려났습니다. 역사적으로 미국 대전략은 유럽 중심이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전제를 뒤집고 있죠.
그렇다면 미국이 그리고 있는 새로운 지도는 어떤 모습일까요?
엘브리지 콜비로 대표되는 우선순위론자들의 구상은 이렇습니다. 콜비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국방부 정책차관으로 임명된 인물로, 그의 구상이 실제 정책으로 집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주된 경쟁자인 중국과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인도 태평양에 해군력을 집중합니다. 서반구는 직접 관할하죠. 유럽과 중동은 동맹국에게 일차적 방위 책임을 넘깁니다.
이 구상에서 미 해군의 역할은 전 세계의 경찰에서 두 개 대양의 수호자로 축소됩니다. 태평양과 서반구에서의 압도적 우위는 사활적 이익으로 유지하되, 나머지 지역은 점진적으로 이양하는 거죠.
해군력은 축소되더라도 소위 '달러의 함정'을 활용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습니다. 전 세계 국가들이 달러 표시 부채를 떠안고 있는 한, 달러 체제에서 이탈하면 부채의 실질 가치가 급등하는 구조적 족쇄에 묶이게 됩니다. 미국은 이 금융적 의존성을 지렛대 삼아, 물리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도 통제력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족쇄가 느슨해지는 순간 악순환이 가속화되겠지만요.
흥미로운 것은 유럽의 대응입니다. EU의 경제 규모를 고려할 때 유럽이 진지하게 군사비를 투입한다면 자체 방위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헤이그 정상회의에서 발트 3국, 폴란드, 북유럽 국가들은 2029년까지 3.5퍼센트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독일은 헌법상의 채무 제한인 '부채 브레이크'를 개정해 방위비 증액의 길을 열었죠. 반면 스페인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이러한 대규모 군비 증강은 인플레이션과 산업적 병목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이 유럽에 제공해온 전략적 수송 능력, 조기경보 체계, 핵우산 같은 소위 전략적 자산은 유럽이 단기간에 대체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이 역량까지 가져간다면, 유럽은 돈을 쓰더라도 상당 기간 방위 공백에 놓이게 됩니다.
해군력에서 시작해 달러 수요와 재정 여력으로 이어지던 선순환 고리는 이미 역전되었죠.
부채 증가가 이자 부담을 낳고, 국방 예산을 압박해 해군력 쇠퇴를 초래합니다. 이는 다시 해상교통로 보장 능력을 약화시켜 달러 신뢰를 떨어뜨리고 자금 조달 비용을 높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이 악순환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이자 지출이 국방비를 분명히 추월한 2025 회계연도가 그 전환점이었죠. 2024년에도 두 항목은 거의 같은 수준(각각 8,799억 달러 대 8,735억 달러)이었고, 2025년에는 격차가 뚜렷해졌습니다.
트럼프의 전략적 축소는 이 악순환에 대한 하나의 답입니다. 모든 바다를 지킬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바다를 선택하겠다는 거죠. 유럽은 스스로 지키고 미국은 중국이 있는 태평양과 서반구에 집중하겠다는 논리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나름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근본적인 리스크가 있습니다. 달러 패권은 미국이 전 세계의 바다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모든 나라가 달러로 결제하고 비축했던 이유는 항로의 안전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죠
미국이 태평양과 서반구로 축소하면, 유럽 앞바다와 중동 항로의 안전은 누가 보장하나요? 힘의 공백기에 항로를 이용하는 국가들이 계속 달러 체제에 머물 인센티브가 있을까요?
2024년 홍해 위기는 그 답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예멘의 후티 반군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빌미로 수에즈 운하로 향하는 상선들에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고, 글로벌 해운 물동량의 15퍼센트가 지나는 이 항로가 사실상 마비됐습니다. 미 해군은 수십 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요격에 나섰지만, 수천 달러짜리 드론을 수백만 달러짜리 미사일로 막는 소모전에서 후티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대영제국의 몰락은 한 번의 결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재정 여력이 약해지자 해군 군축으로 지키는 바다의 범위를 좁혔고, 그때마다 파운드화의 위상도 함께 줄었습니다. 미국이 지금 밟고 있는 길이 이와 같은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역사가 보여주는 패턴은 존재합니다. 제국이 지키는 바다의 축소는 느리게 시작되어 어느 순간 급격해집니다.
38조 달러를 넘어선 국가부채, 1조 달러에 달하는 이자, 232배의 조선 격차. 이 숫자들은 단순한 재정 통계가 아니라, 팍스 아메리카나의 새로운 해안선을 그리고 있는 좌표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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