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징어 게임>이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데는 이야기의 힘만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장르적 문법을 교묘하게 변형시켜 불편함을 유발하고, 동시에 익숙한 상징들을 낯설게 재배열한다. 아동기의 순수한 놀이를 생사의 무대로 뒤틀어 놓는 방식은 공포와 스릴을 극대화하면서, 이 드라마가 단순한 서바이벌이 아님을 보여준다.
무궁화 꽃과 죽음의 리듬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첫 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다. 4미터 높이의 거대한 로봇 인형 '영희'가 놀이를 주관하고, 그 눈에 장착된 동작 감지 센서에 '감지'되는 순간 진행 요원의 저격총에 즉사한다. 이 인형은 제작진이 옛날 교과서의 '철수와 영희' 일러스트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했다고 밝혔으며, 미술감독 채경선에 따르면 황동혁 감독이 "너무 귀엽거나 부드러운 외모보다는 약간 기괴한 느낌이 있었으면 했다."며 "얼굴 표정과 의상을 다양하게 스케치한 뒤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골라 인형극의 마리오네트 같은 느낌으로 완성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장면이 충격적인 이유는 단순한 시각적 폭력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뛰어놀았던 놀이의 기억이 살인을 동반한 구조로 변형되면서, 관객의 무의식을 정조준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 낯섦 속에서 불쾌함을 유발한다. 이는 장르적으로 공포의 정통 기법이다.
드라마는 줄곧 유년기의 게임을 차용한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유리다리. 이 놀이들은 원래 규칙이 명확하고, 승패가 단순하며,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사회화 장치였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그 친숙한 프레임을 빌려 극단적 상황을 연출한다. 놀이란 원래 공동체 안에서 신뢰를 확인하는 기제였지만, 여기선 불신과 배신을 전제로 작동한다.
복고와 디스토피아의 결합
시각적으로도 드라마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참가자들이 이동하는 기하학적 계단은 네덜란드 출신 초현실주의 판화가 에셔의 무한계단에서 힌트를 얻었다. 미술감독 채경선은 "출구도 입구도 어딘지 모른 채 참가자들은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과 이들이 미로 같은 공간에서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제작진과 배우들도 그 안에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색채 역시 유년의 세계를 암시한다. 파스텔톤 벽지, 커다란 공, 알록달록한 침대. 그러나 이 모든 색은 피와 절망으로 물들며, 시청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년은 정말 안전했는가?"
참가자들의 숙소는 터널과 대형마트, 콜로세움을 은유적으로 풀어낸 공간이다. 채경선은 "버려진 사람들에게 터널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감시자들이 서 있는 공간은 터널 벽면 마감재를 썼다"며 "대형마트에 쌓인 물건과 같은 처지라는 의미로 침대를 구성했는데 경쟁사회를 은유하는 계단식, 사다리식으로 구성하다 보니 결국엔 콜로세움 같은 경기장 모양이 됐다"고 설명했다.
장르의 무경계와 예측 불가능성
<오징어 게임>은 명확한 장르 구분을 거부한다. 서바이벌 스릴러인 동시에 사회풍자극이고, 공포(호러)와 드라마의 요소도 포착된다. 이는 최근 한국 장르물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장르적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가운데, 이 드라마는 특정한 결말을 예측하는 것을 방해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장르 전복의 방식이 무력감과 분노를 유도한다는 점이다. 시청자는 처음엔 단순한 규칙과 스릴에 이끌려 이야기에 몰입하지만, 이내 감정적 혼란에 빠진다. 누굴 응원해야 할지,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고전적 서바이벌 장르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오징어 게임>은 정답 없는 세계를 제시하며, 생존 그 자체보다 그 과정의 붕괴를 보여준다.
현실감과 인공성의 이중주
구슬치기를 하는 골목 세트는 가장 공을 들인 것 중 하나다. 골목 구석의 이끼까지 심어 넣을 정도로 오래전 골목길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 하늘과 조명은 지나칠 만큼 인공적이다. 채경선은 "영화 '트루먼쇼'처럼 진짜와 가짜가 섞인 이중적인 의미를 주고 싶었는데 정들었던 사람을 죽여야 하는 양면적 감정도 진짜와 가짜 사이의 혼란에서 왔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컴퓨터 그래픽을 최소화하고 대부분의 세트를 직접 지어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극대화했다. 이런 현실감과 인공성의 결합은 시청자로 하여금 "이것이 정말 게임인가, 현실인가"라는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전 세계적 반향과 문화적 확산
작품의 성공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선다. 뉴욕에서는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오징어게임: 더 익스피리언스'가 운영되어 하루 1,500명씩 3주간 매진을 기록했다. 올림픽공원에 설치된 4미터 높이의 영희 인형 앞에서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외에서는 'Red Light, Green Light'라는 이름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가 퍼졌고, 할로윈 시즌에는 관련 의상이 대유행했다.
이는 단순한 한류의 확산이 아니라, 전 지구적 불안과 공포가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놀이가 더 이상 놀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것은 장르가 아니라 현실의 축소판이 된다. <오징어 게임>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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