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학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능이 분리되면 법인도 분리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다는 뜻입니다.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DSO(배전계통운영자)의 역할을 법조문으로 명확히 규정한 지금, 우리는 그 조건이 완성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설계도가 먼저 그려진다
지금까지 배전망 운영은 '한전 직원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경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굳이 경계를 그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법은 출력 제어, 계통 예측, 배전망 감시라는 업무들에 'DSO의 고유 권한'이라는 이름표를 붙였습니다. 소프트웨어로 치면 특정 기능을 '모듈화'한 것입니다. 모듈화된 코드는 언제든 다른 프로그램에 붙여 넣을 수 있습니다. 기능의 경계가 그어진 순간, 그것을 별도 법인이라는 그릇에 담는 일은 기술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훨씬 쉬워집니다.
'심판이 선수를 겸하면 안 된다'는 논리
민간 분산에너지 사업자가 늘어날수록 불가피하게 제기될 문제가 있습니다. 한전 산하의 DSO가 민간 사업자에게 출력 제어, 즉 사실상의 영업 정지를 명령하는 것이 공정한가 하는 이해 상충 문제입니다.
이 논리는 이미 해외에서 현실이 됐습니다. 영국의 National Grid는 수십 년간 전력망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운영까지 맡아왔는데, 규제 당국(Ofgem)은 "소유자가 심판까지 겸하는 구조는 공정하지 않다"며 분리를 권고했고, 2024년 10월 국가에너지시스템운영자(NESO)가 별도 독립기구로 출범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영국 정부가 NESO를 민간이 아닌 국유화 형태로 출범시켰다는 것입니다. 이해 상충을 해소하되, 공공성은 지키겠다는 선택이었습니다. 한국에서 DSO 독립법인화 논의가 시작된다면, 이 영국 사례는 가장 먼저 인용될 정책 선례가 될 것입니다.
이 논리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공정한 심판이 있어야 민간 분산에너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닙니다. 문제는 '분리'가 어떤 방식으로 설계되느냐에 있습니다.
자산과 운영이 갈라질 때 생기는 일
EU는 전력 시장 자유화 과정에서 회원국들에게 전력망 운영을 발전·판매 사업자로부터 법적으로 분리하도록 요구했고(Third Energy Package, Clean Energy Package),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결과는 복합적이었습니다. 전문성이 높아지고 경쟁이 촉진된 긍정적 효과가 있었던 반면, 독립법인화된 운영사들이 수익성과 효율에 집중하면서 보편적 서비스나 요금 안정성 같은 공공성 영역이 뒤로 밀리는 문제도 드러났습니다.
한국의 DSO가 독립법인이 된 이후 만약 민영화나 외주화의 경로를 밟는다면, 전기가 공공재로서 지녀온 보편적 접근권과 요금 안정성에 균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운영 효율화'라는 명분이 '에너지 복지 약화'의 우회로가 되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속도가 달라진다
현재는 한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DSO이지만, 이미 법적으로 기능의 경계선이 그어진 이상, 독립법인화의 명분은 언제든 빠르게 조달될 수 있습니다. 시장 자유화를 중시하는 정권에서는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을 내세울 것이고, 공공기관 효율화를 중시하는 정권에서는 '슬림한 한전 만들기'를 명분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미 모듈화된 기능은 별도 법인으로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분산에너지법이 만들어 놓은 것은 DSO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동시에, 그 권한이 한전 바깥으로 이동할 수 있는 법적 발판입니다. 독립법인화가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분리 이후의 설계'입니다. 요금 결정 과정에 대한 독립적 감시, 보편적 서비스 의무의 명문화, 민영화 방지 조항 같은 안전장치가 선제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설계도는 언젠가 공공성을 조용히 해체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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