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에 금태환을 정지한 닉슨 쇼크 이후, 달러의 위상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이 깨지자 전 세계는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죠. '무엇을 믿고 이 종이돈을 받아야 하는가?' 달러 가치는 폭락했고, 미국 경제는 통제 불능의 물가 상승에 직면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달러를 구원할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중동의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였죠.
1974년,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주도하는 외교적 협상에서 재무장관 윌리엄 사이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투자은행가 출신인 그는 1974년 7월 사우디 방문을 통해 막대한 석유 대금을 다시 미국으로 되돌릴 금융 메커니즘 구상에 기여했죠.
합의의 골자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했습니다. 미국은 사우디에게 최첨단 무기를 제공하며 안보를 보장하고, 그 대가로 사우디는 석유 거래를 달러로 진행하며 번 돈을 다시 미국 국채에 재투자하는 구조였습니다. 이후 1975년까지 OPEC 산유국들이 사실상 달러 결제 관행을 따르게 되면서, 달러는 금 대신 검은 황금을 새로운 닻으로 삼게 됩니다. 달러 패권의 뼈대인 페트로달러 체제의 시작입니다.
일반적인 국가라면 돈을 막 찍어낼 경우 통화량이 급증하며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도 상당 부분이 해외로 유출됩니다. 전 세계가 자산 가치 희석이라는 형태로 미국의 부채를 분담하는 것을 경제학적으로 인플레이션의 수출이라고 부릅니다.
2020년 3월, 세계는 동시에 멈췄습니다. 연준은 이틀 만에 기준금리를 제로로 내렸고, 의회는 단 몇 주 만에 막대한 경기부양책을 통과시켰습니다. 팬데믹 2년 동안 미국이 시장에 투입한 유동성은 재정지출 약 5조 달러와 연준의 자산 확대분 약 4조 달러로 총 9조 달러에 달했죠. 재정지출은 가계와 기업에 직접 현금을 꽂아준 반면, 연준의 자산 매입은 금융시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작동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양적완화는 연준이 만든 돈이 시중은행의 초과지급준비금으로 쌓인 채 실물경제에 흘러들지 못했습니다. 연준이 초과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이 결정적이었죠. 하지만 2020년은 달랐습니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유례없는 시너지가 폭발하여 헬리콥터 머니처럼 직접 가계와 기업에 현금이 투입되었습니다. 공급은 팬데믹으로 막혀 있는데 수요는 인위적으로 대거 부양되었죠.
그 결과, 2022년 6월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9.1%를 기록하며 41년 만의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연준은 급격히 방향을 틀어 불과 16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에서 5.25%로 끌어올렸습니다. 이 극단적인 조치는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과 8%에 육박하는 모기지 금리 등 경제 곳곳에 파열음을 냈습니다.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의 통찰대로 과도한 부채가 누적된 시스템에서 인위적인 경기 부양은 언제나 더 격렬한 붕괴의 씨앗을 낳는 법이죠.
페트로달러 체제는 신사협정에 가까웠습니다. 공식 문서도, 명시된 계약기간도 없었죠. 이 암묵적 질서가 실질적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우디는 중국과 500억 위안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고, 국제결제은행(BIS)의 mBridge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달러를 우회하는 실시간 CBDC 결제망 구축에 가담했습니다. 중국은 이미 사우디 연간 원유 수출량의 4분의 1을 소화하는 최대 수입국이죠. 사우디는 더 이상 미국 국채를 순매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국의 거대한 경제 개발계획(비전 2030)을 위해 시장에서 돈을 빌리고 자산을 매각하는 처지죠. 페트로달러 리사이클링의 핵심 고리인, 석유 수익으로 미국 국채를 사는 순환이 작동하지 않는 셈입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시화된 달러의 무기화도 이 흐름을 가속화했습니다. 러시아 외환 보유고를 동결하는 것을 지켜본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달러 의존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실감했죠.
물론, 대안 통화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축통화국이 되려면 미국처럼 막대한 무역적자를 감수하면서 전 세계에 자국 통화를 끝없이 공급해야 하죠. 중국이나 독일 같은 제조업 기반의 수출 강국들은 자국 산업을 희생하면서 무역적자를 용인할 의사가 없고, 여전히 폐쇄적인 자본 통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달러 패권의 암묵적 전제는 미국이 거대한 소비 시장을 열어준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중국, 유럽 등이 국채 실질가치 하락이라는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달러 체제에 남아 있었던 핵심 이유가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 때문이었죠. 달러를 벌기 위해 미국에 수출하고, 번 달러로 미국 국채를 사는 순환이 50년간 이 체제를 지탱해 왔습니다.
트럼프의 리쇼어링과 관세 정책은 단순한 보호무역주의를 넘어, 기축통화국 역할을 포기하고 1950년대식 제조업 강국으로 회귀하겠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정책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데 있죠. 기축통화국의 특권은 하나의 패키지입니다. 저금리 국채 조달, 달러 수요 유지, 무역적자 감수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트럼프는 이 중에서 저금리·약달러라는 열매만 취하면서, 무역적자라는 비용은 거부하겠다는 입장이죠. 메뉴에서 원하는 것만 골라 먹겠다는 발상이지만, 이 메뉴는 세트로만 팝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저금리와 약달러, 두 가지입니다. 저금리는 미국이 매년 천문학적 규모로 발행하는 국채의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고, 약달러는 수출 경쟁력을 높여 무역적자를 축소하기 위한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치명적인 모순이 발생합니다. 외국 중앙은행들이 미국 국채를 사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달러를 확보해 무역결제에 쓰기 위해서, 그리고 자국 통화 절상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관세 장벽으로 대미 수출이 줄어들면 달러를 벌 경로 자체가 줄어들고, 약달러 정책은 환율 방어를 위해 국채를 살 유인마저 없앱니다. 설령 트럼프의 희망대로 저금리 환경이 조성된다 해도, 수익률이 낮아진 국채를 굳이 신규 매입할 이유가 없어지죠. 기존 보유자는 채권 가격 상승으로 평가차익을 누리지만, 신규 매입자에게 저금리 국채는 매력이 없는 자산입니다.
결국 트럼프는 국채 공급은 늘리면서(재정적자 확대) 수요는 줄이는(외국 매입 유인 감소) 양방향으로 동시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국채 수요가 줄면 금리는 오릅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저금리 및 약달러와 정반대 방향이죠. 기축통화국은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적자를 감수해야 하지만, 적자가 누적되면 통화 신뢰가 하락하는 이 딜레마를 트리핀 딜레마라고 부릅니다. 적자를 없애면서 기축통화 특권을 유지하는 정책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런 정책은 연준의 기준금리와 시장 금리가 따로 움직이는 디커플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연준은 단기 금리를 직접 통제하지만, 장기 국채 수익률은 시장이 결정합니다. 감세 및 재정적자 확대로 국채 공급이 늘고, 외국 중앙은행의 수요는 줄고, 관세발 인플레이션 재점화 우려까지 겹치면 시장은 장기 금리에 인플레이션 프리미엄을 추가로 얹죠. 연준이 금리를 내려도 장기 국채 수익률이 오히려 오르는 현상이 소위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 현상입니다.
실제로 2024년 말 연준이 금리를 내리는 동안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오히려 상승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 경제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금리는 연준의 기준금리가 아니라 10년물, 30년물 장기 국채 수익률입니다. 모기지 금리, 기업 회사채 금리, 학자금 대출 금리가 모두 장기 국채에 연동되기 때문이죠. 연준이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려고 해도, 장기 금리가 오르면 실물경제에는 긴축 효과가 그대로 남습니다. 트럼프가 연준에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연준이 이에 굴복해 단기 금리를 내리면, 시장은 인플레이션과 재정 우려로 장기 금리를 끌어올립니다. 모기지와 기업 대출 금리는 오히려 오르고, 경기 부양 효과는 없는데 달러 신뢰만 추가로 훼손되는 거죠. 트럼프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리쇼어링의 현실도 냉혹합니다. 1950년대 미국 제조업 패권은 유럽과 일본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진공 상태에서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중국, 한국, 대만, 독일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이미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설령 제조업이 돌아온다 해도, 자동화로 인해 과거 같은 대규모 고용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죠. 트럼프 핵심 지지층이 원하는 '좋은 제조업 일자리'는 흘러간 과거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역설이 발생합니다. 미국이 관세를 높이고 달러 유출을 막으면 기축통화 지위가 즉각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적으로는 전 세계에 달러 가뭄이 발생합니다. 달러 표시 부채를 갚기 위해 달러가 절실한 신흥국들은 줄어든 달러를 구하기 위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고, 이는 역설적으로 달러 가치를 끌어올립니다. 패권국의 닫힌 문이 주변국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달러의 족쇄를 단기적으로 더욱 조이는 거죠. 트럼프가 약달러를 원할수록, 정작 그의 정책은 단기 달러 강세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입니다.
결국 트럼프의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시도는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50년간 누려온 가장 큰 특권, 즉 전 세계가 미국의 적자를 대신 떠안아주는 구조를 스스로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지지율을 위해 장기적 달러 패권의 토대를 갉아먹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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