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을 보신 분이라면, 신선조를 아실 겁니다. 유신 지사와 '신선조(신센구미)'는 서로 다른 정의를 위해 칼을 휘둘렀지만, 사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과거를 향해 있었습니다. 국체의 중심이 일왕이냐 막부냐의 차이였죠.

신선조가 무너져가는 막부를 붙들려 했다면, 유신 지사들의 가슴에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죠. 하지만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은 서구 열강을 밀어내고 고대의 천황 중심 질서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적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칼과 광기 어린 신념의 시대에, 홀로 칼 대신 세계 지도를 펼쳐 든 이단아가 있었고 바로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료마는 번(藩)을 탈출해 무역 회사인 '해원대'를 설립하며 경제와 국제 정세를 익혔습니다. 그에게 유신은 단순히 누가 권력을 잡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이라는 배의 엔진을 통째로 갈아 끼우는 근대적 대전환을 꿈꿨죠. 그 설계도가 '선중팔책(船中八策)'이었습니다.
1867년, 료마가 암살로 죽자 정권을 잡은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들은 '강한 일본'을 원했고, 료마의 설계도에서 '근대 국가' 아이디어를 빌려왔죠.
당시 일본은 아편전쟁으로 무너진 청나라를 보며 "강해지지 않으면 내일은 우리의 차례"라는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선중팔책에서 료마가 제안한 여론 중심의 공동체 대신 부국강병과 효율을 우선시하는 국가주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료마는 의회를 설치해 공론을 수렴하는 정치를 하길 원했지만 신정부 엘리트들은 효율성을 위해 조슈와 사쓰마 출신 관료들이 밀실에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밀실 정치를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150년이 지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죠.
료마는 세계와 자유롭게 교역하는 해양 무역 국가를 꿈꿨지만, 메이지 정부의 엘리트들은 대외팽창을 선택했고 료마가 꿈꿨던 무역선은 대륙을 향하는 군함으로 변해갔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메이지 헌법은 일왕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특히 군대의 지휘권을 일왕에게 귀속시키고 내각의 통제 밖으로 분리한 선택은, 훗날 일본이 군국주의로 폭주하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의회에게는 폭주하는 육군을 제어할 수단이 없었으니까요.
현대 일본 정치가 겪고 있는 경직성과 정치적 무관심은 이토 히로부미가 설계한 수직적 통치 시스템이라는 낡은 부품이 배후에서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오늘날 일본인들은 사카모토 료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으며 그의 자유로운 정신을 동경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발을 딛고 사는 사회는 정한론과 대외팽창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후예들이 설계한 냉혹한 현실주의자들의 건축물이죠.
아베 전 총리는 요시다 쇼인을 유일하게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는데 일본 극우들의 꿈은 메이지 체제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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