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인도-파키스탄 분단: 식민지 유산이 남긴 상처

엘노스 2025. 6. 12. 07:56

 

1947년 6월 3일 영국의 인도 총독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식민지 인도의 분리 독립 계획을 발표했다. 힌두교도가 다수인 지역은 인도 공화국으로, 무슬림 지역은 파키스탄이란 별도 주권국가로 각각 독립한다는 결정이었다. 이 계획은 간디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인도 지도자들의 동의 하에 영국 내각의 최종 승인을 얻은 것이었다. 이에 따라 8월 15일 인도대륙은 독립과 동시에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로 나뉘어졌다.

인도대륙의 분립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배타적 종파주의, 양 종교를 대표하는 정치단체인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의 지속적인 대립과 반목에 기인한다. 이는 영국의 '분리하여 통치한다'는 식민통치정책의 결과였다. 영국은 한때 벵골 지방을 동서(무슬림, 힌두교도 지역)로 분할함으로써 종교 대립을 야기했고, 분리선거제를 도입해 소수파였던 무슬림에 힘을 실어 주었다. 무슬림에 의해서만 무슬림 대표를 선출한다는 분리선거제는 무슬림 자치의 단초가 되었다.

독립을 위해 공동투쟁하기도 했던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은 1937년 지방의회선거 이후 완전히 갈라섰다. 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국민회의가 애초의 약속을 뒤집고 무슬림연맹을 연립내각에서 배제해버린 것이다. 배신감을 느낀 무슬림연맹의 지도자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급진적인 분리주의자로 돌아서 무슬림 국가 창설을 주도했다.

 

라드클리프 라인: 5주 만에 그어진 운명의 경계

영국 정부가 인도 분할을 위해 파견한 시릴 라드클리프 경은 파리 동쪽으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인도나 아시아 어느 곳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47년 7월 8일 인도에 도착한 후 단 5주 만에 45만 km²의 영토와 8,800만 명의 운명을 가를 국경선을 그어야 했다. 1947년 8월 17일 공개된 '라드클리프 라인'은 종교 인구 분포를 기준으로 설정되었지만, 실제로는 지역의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탁상에서 그어진 선에 불과했다.

라드클리프와 다른 위원들은 모두 변호사 출신으로, 국경 설정에 필요한 전문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는 국경 설정의 확립된 절차나 정보에 대해 조언할 전문가도 없었고, 측량과 지역 정보를 수집할 시간도 없었다. 이 국경선은 펀자브와 벵골 지역을 관통하며 수많은 마을과 가족을 갈라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 앞마당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라드클리프 위원회가 인도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에서 각각 2명씩 위원을 배정받아 구성되었지만, 양측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상황에서 결국 모든 최종 결정은 라드클리프 혼자 내려야 했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적 고려사항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캘커타 항구와 그 배후지인 동벵골의 황마 생산지가 분리되었고, 펀자브의 잘 발달된 관개 시설이 임의로 나뉘어 도로, 전화, 전신 통신은 물론 지역의 중요한 관개 시스템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대이주와 집단학살

분단과 함께 시작된 인구 이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난민 사태 중 하나였다. 약 1,400만 명이 새로운 국경을 넘어 이주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 연구에서는 200만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숫자는 공식 기록에 불과하며, 실제 희생자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주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차역에서는 승객 전원이 학살당한 '유령 열차'가 도착했고, 도로에서는 이주민 행렬이 습격당해 수천 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여성들에 대한 조직적 성폭력과 납치도 광범위하게 발생했으며, 최대 10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거나 납치되었다. 일부 가족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여성 가족구성원을 직접 살해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폭력이 단순한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양측의 극단주의 세력들은 '종족 청소'를 통해 동질적인 종교 공동체를 만들려 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년간 평화롭게 공존해온 혼합 공동체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분단의 상처는 단순히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 집단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후 양국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적대적 공생: 갈등이 만든 정치적 정체성

분단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적대적 공생' 관계에 빠졌다. 양국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자국의 정치적 통합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특히 파키스탄의 경우 더욱 두드러졌는데, 파키스탄은 '인도가 아닌 것'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국가 통합을 도모했다.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국경 갈등을 국내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선거 시기가 되면 상대국에 대한 강경 발언이 증가했고, 국내 문제에서 주의를 돌리기 위해 국경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갈등의 정치화'는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들을 지속적으로 좌절시켰다.

군사적 대결 또한 양국의 정치적 정체성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47년 이후 네 차례의 전쟁(1947-48, 1965, 1971)과 1999년 카르길 분쟁을 치른 양국은 각각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국방비에 투입했다. 1998년 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서 갈등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되었고, '핵 억제 하의 갈등'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종교 민족주의의 탄생

분단은 종교를 단순한 신앙 체계에서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 변화시켰다. '두 민족 이론'에 기반해 탄생한 파키스탄은 이슬람을 국가 정체성의 기초로 삼았고, 인도 역시 공식적으로는 세속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힌두 다수의 문화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 간 관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분단 이전까지 인도 대륙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특한 혼합 문화를 형성해왔다. 무굴 제국 시대의 건축, 음악, 문학은 이러한 문화적 융합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분단과 함께 종교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과거의 공통 유산은 점차 잊혀지거나 정치적으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분단이 각국 내부의 종교적 소수자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파키스탄이 본래 인도의 무슬림 소수 민족을 위한 '조국'으로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무슬림이 파키스탄 건국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고, 파키스탄으로 이주한 것도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1951년 인구조사에서 약 10%를 차지하며 독립 인도에서 가장 큰 소수 집단으로 남았다. 이들은 '내부의 타자'로 취급되며 완전한 시민권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1947년 분단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시아 정치를 규정하고 있다. 양국은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에서의 충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테러와 반테러 작전이 일상화되었다. 2019년 발라코트 공습과 그에 따른 공중전은 핵 보유국 간의 직접적 군사 충돌이 여전히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분단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으며, 경제적 실용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크리켓 경기나 볼리우드 영화를 통한 문화적 교류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중국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변수는 양국으로 하여금 관계 재정립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도 종교적 박해로 인한 인구 이동이 계속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힌두교도들이 인도로 계속 피난을 가고 있으며, 대부분 라자스탄 주에 정착하고 있다. 파키스탄 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13년에만 약 1,000개의 힌두 가정이 인도로 피난했으며, 매년 약 5,000명의 힌두교도가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하고 있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단은 탈식민화 과정에서 발생한 20세기의 대표적 비극 중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재정이 고갈된 제국의 철수로 인한 성급하고 부주의한 국경 설정이 가져온 상처는 7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분단은 단순히 영토를 나눈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체성과 기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상을 분열시켰다.

영국 관리들이 양 독립국을 영연방에 남겨두려는 목표를 달성한 후, 모든 과정을 서둘렀다. 제국 국가의 성급한 해체는 폭력을 다루기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많은 폭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제국 국가는 법과 질서 유지 능력과 책임감을 포기하면서 일상적인 지방 정치를 다루려는 행정관들에게 거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정치적 편의에 의한 결정이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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