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켄터베리 이야기: 순례길에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

엘노스 2025. 6. 5. 11:47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는 14세기 영국 문학의 걸작으로, 중세 말기 영국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켄터베리 대성당으로 순례를 떠나는 29명의 순례자들이 여행길에서 들려주는 24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구성과 배경

작품은 런던 남쪽 사우스워크의 태버드 여관에서 시작된다. 각기 다른 계층과 직업을 가진 순례자들이 모여 켄터베리로 향하는 여행길에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 경연을 벌이기로 한다. 여관 주인의 제안에 따라 가는 길과 오는 길에 각자 두 편씩 총 네 편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지만, 실제로는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아 24편의 이야기만이 전해진다.

다양한 사회 계층의 인물들

순례자들은 중세 영국 사회의 거의 모든 계층을 대표한다. 기사, 수도원장, 수녀, 수도사, 탁발승, 상인, 법률가, 의사, 목수, 방앗간 주인, 농부 등이 등장하며, 각자의 직업과 신분에 따른 독특한 성격과 가치관을 드러낸다. 특히 초서는 '일반 서문'에서 각 인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그들의 외모, 성격, 사회적 지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주요 이야기들

기사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기사도 로맨스로,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팔라몬과 아르시테의 사랑 이야기다. 두 기사가 한 여인 에밀리를 두고 벌이는 경쟁과 운명의 개입을 다룬 서사시다.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는 기사의 고상한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는 저속하고 우스꽝스러운 소화(笑話)다. 젊은 아내를 둔 늙은 목수가 하숙생에게 속아 바보가 되는 이야기로, 중세의 파블리오 전통을 보여준다.

바스의 아내 이야기는 여성의 지위와 결혼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다섯 번 결혼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녀관계에서 여성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아서왕 전설을 배경으로 한 기사와 추한 노파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묻는다.

교구 서기의 이야기는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탐욕스러운 법무관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교훈적인 이야기다. 종교적 메시지와 함께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비판한다.

문학적 성취

초서는 각 이야기를 해당 화자의 성격과 사회적 배경에 맞게 서술하는 뛰어난 기법을 보여준다. 고상한 기사는 장엄한 서사시를, 저속한 방앗간 주인은 음담패설을, 학식 있는 성직자는 교훈적인 우화를 들려주는 식이다. 이러한 다성악적 구성은 작품에 풍부한 층위와 깊이를 부여한다.

언어적으로도 초서는 당시 새로이 형성되던 중세 영어를 문학어로 승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어나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이처럼 완성도 높은 문학작품을 창조함으로써 영국 문학사에 획을 그었다.

사회 비판의 날카로움

작품 전반에는 중세 말기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스며있다. 특히 종교계의 타락과 위선을 신 랄하게 꼬집는다. 탐욕스러운 탁발승, 속물적인 수도사, 부패한 면죄부 판매인 등을 통해 당시 교회의 세속화와 도덕적 타락을 고발한다. 동시에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속물성과 귀족 계급의 허위의식도 예리하게 포착한다.

마무리하며

<켄터베리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 모음집을 넘어서 14세기 영국 사회의 종합적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초서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편견 없이 그려내면서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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