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망명자들의 절망적이면서도 숭고한 사랑 이야기다. 작품의 제목인 '개선문'은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절망과 어둠의 배경이 된다. 작품은 독일 망명자 라비크와 이탈리아계 가수 조앙 마두의 만남을 중심으로,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 앞에서 무력한 개인들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운명적 만남과 절박한 현실
소설은 센 강의 알마 다리에서 시작된다. 40대 초반의 외과의사 라비크는 어둠 속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는 밤무대 가수 조앙 마두를 우연히 구해주며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라비크는 본명이 루드비히 프레젠부르크인 독일인으로, 나치 게슈타포에 쫓겨 파리로 도피한 불법체류자다. 베를린에서 종합병원 외과과장이었던 그는 친구들을 숨겨주다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고, 그 과정에서 연인 시빌이 게슈타포 하케의 고문으로 죽음을 맞았다. 탈출 후 파리에서 그는 위조 신분증으로 생활하며 무허가 의사로서 대리 수술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한다.
조앙 마두는 루마니아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를 둔 무명 가수로, 순진무구하면서도 충동적인 성격이다. 그녀는 "술을 마실 때면 술이 전부, 사랑할 때면 사랑이 전부, 절망할 때는 절망이 전부"인 여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그녀의 단순함과 직설적인 감정 표현은 복잡하고 어두운 현실에 지친 라비크에게 신선한 위안이 된다.
사랑과 절망의 이중주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라비크는 언제든 추방될 수 있는 신분이고, 조앙은 불안정한 무대 생활을 하는 가수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에는 절망적 현실을 초월하는 순수함이 있다. 라비크는 그동안 집도 가구도 소유하지 않으며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살아왔지만, 조앙과의 만남 이후 안정된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들이 함께 휴양지로 떠나는 여행은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로, "불안의 시대에 사랑의 도피와 일탈은 사치가 아니라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지속되기 어렵다. 라비크가 신분이 발각되어 추방당하는 동안 홀로 남겨진 조앙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 이 부분에서 레마르크는 인간의 연약함과 생존 본능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조앙의 배신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적 한계의 표현이다.
복수와 운명의 완성
작품의 또 다른 축은 라비크의 복수 서사다. 그는 파리에서 우연히 자신의 연인을 죽인 게슈타포 하케를 발견하고 치밀하게 복수를 계획한다. 하케는 업무차 파리에 온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라비크는 결국 하케를 숲으로 유인해 살해함으로써 오랜 복수를 완성한다. 이 장면은 개인적 복수를 넘어 나치즘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복수의 완성과 동시에 더 큰 비극이 찾아온다. 조앙의 새로운 연인이 질투에 사로잡혀 그녀를 총으로 쏘는 사건이 벌어진다. 라비크는 필사적으로 수술을 시도하지만 조앙은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죽어가는 조앙과 라비크는 각자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로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데, 언어는 달라도 사랑의 본질은 통한다는 메시지가 절절하게 전해진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희망
소설의 마지막은 절망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된다. 라비크는 다른 망명자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인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이미 보이지 않았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승리와 영광의 상징인 개선문마저 어둠에 가려진 것은 희망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
반전 문학의 걸작
<개선문>은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존엄성을 다룬 반전 문학의 걸작이다. 레마르크는 개인적 사랑 이야기에 나치즘에 대한 고발과 전쟁에 대한 증오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연애소설을 반전소설화"하는 데 성공했다. 작품에는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애국적 경향도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전쟁이 가져다주는 허무성과 휴머니즘에 입각한 반전사상만이 일관되게 흐른다.
특히 파리에 모여든 각국 망명자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 개인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라비크의 동료 모로소프, 미국인 상속녀 케이트 헤그스트럼, 악덕 의사 뒤랑 등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버텨나가는 모습은 전쟁의 보편적 비극성을 드러낸다.
<개선문>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이 계속되는 현재에도 유효한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둠이 가장 짙을 때 더욱 빛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반전 문학의 영원한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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