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부터 시행된 AI 기본법 조문을 읽어보니 실용주의의 끝판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U가 세계 최초로 AI 규제법(AI Act)을 통과시키고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한국은 모든 조항을 전면 시행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포괄적인 AI 기본법을 전면적으로 시행한 세계 첫번째 국가가 되었죠. 외신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더군요.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강한 규제에 중점을 둔 EU의 AI 규제법과 비교하면, AI 기본법은 규제보다는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워터마크 및 고지 의무 등)을 정해주고 나머지는 민간의 자율에 맡기는 성격이 강합니다. 대신에 생체인식, 의료기기, 에너지/수도 공급, 대출 심사 등 민감한 분야(고영향 AI)를 다루는 기업은 위험 관리 방안을 수립해야 합니다.
EU의 AI Act와 한국 기본법의 방향이 다른 이유는 EU는 주로 미국 빅테크를 규제하고 시민의 기본권 보호에 중점을 둔 반면에, 소버린 AI 구축을 국가과제로 선정한 한국은 AI 자주권과 국내 AI 생태계 구축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트업들에게 EU 식의 막대한 과징금을 매긴다면 높은 진입 장벽이 될 수 있으니까요.
참고로 EU는 매출액의 7퍼센트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는데 미국 빅테크들은 수조 원의 과징금을 물 수도 있습니다. 기본법의 3천만원 과태료와는 비교가 안되죠.
AI 기본법은 컴퓨팅 자원과 데이터 지원, 기술 도입 촉진 등의 조항을 통해 스타트업 지원 의도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AI 기본법의 산업 지원 취지에 따라 고성능 GPU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추가경정예산으로 확보한 GPU 1만 3,000장 중 4,000여 장을 배분했죠. 자본이 부족한 스타트업도 국가 지원을 통해 서버 비용 부담을 대폭 줄이면서 자체 AI 모델을 실험할 수 있습니다. AI 기본법에 따라서 공공기관이 보유한 양질의 데이터도 AI 학습용으로 가공하여 개방합니다.
또한 AI 기술이 필요한 전통 중소기업(제조, 농업 등)이 스타트업의 AI 솔루션을 도입할 때 정부가 AI 바우처 형태로 비용을 보조합니다. 정부가 판로 개척을 앞장서서 도와주는 셈이죠.
개인적으로 영국의 인공지능안전연구소를 벤치마킹한 한국 인공지능안전연구소(K-AISI) 설립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안전 연구소라고 하면 기업을 감시하는 기관을 떠올리기 쉽지만, 인공지능안전연구소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영미의 연구소를 벤치마킹함으로써, 한국 스타트업이 연구소의 가이드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해외 진출할 때 필요한 안전 기준을 미리 충족하게 해줍니다.
유럽의 규제 기관이 잘못을 찾아 벌금을 매기는 '심판'이라면, 인공지능안전연구소는 기업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화이트 해커'이자 '코치'에 가깝습니다. 인공지능안전연구소가 AI 위험 평가와 안전성 검증을 지원함으로써, 자본이 부족한 스타트업들도 글로벌 안전 기준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죠.
결론적으로 AI 기본법은 미국의 방임주의와 EU의 규제 중심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한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은 큰 원칙을 정하고 구체적인 기준은 시행령에 위임함으로써 빠른 기술 변화에 따라 규제의 높낮이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인 접근이죠.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다카이치 총리와 일본회의 (0) | 2026.02.21 |
|---|---|
| 이재명 정부의 북극항로 정책 (0) | 2026.02.21 |
| 한국과 영국의 AI 전략 비교 (1) | 2026.01.01 |
| 전기차 혁명 (3) | 2025.08.31 |
| 스마트홈, 편리함의 이면 (1) | 2025.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