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디지털 후진국 일본

엘노스 2025. 6. 17. 14:05

 

 

일본은 세계적으로 기술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지닌 나라다. 정밀 기계, 반도체 장비, 로봇 산업 등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유지해왔고, 소니나 파나소닉처럼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브랜드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와 달리, 일본 정부의 디지털 전환은 유난히 느리고 비효율적이다. 202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본 사회 내부에서조차 '디지털 후진국'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팬데믹이 드러낸 디지털의 민낯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전환을 앞당긴 계기였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행정 시스템의 후진성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확진자 정보의 집계 방식이었다. 2020년 당시 도쿄도와 일부 현에서는 보건소가 감염자 수를 팩스로 보고하고, 담당자가 일일이 손으로 엑셀 파일에 옮겨서 집계하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었다. 중복 보고나 누락이 잦았고, 이로 인해 실제 감염자 수가 늦게 반영되거나 통계 오류가 발생했다.

정부가 지급한 긴급 지원금(1인당 10만 엔) 역시 큰 혼란을 겪었다. 온라인 신청 시스템은 접속 장애가 잦았고, 지자체 간 행정망이 연동되지 않아 신청서를 직원들이 일일이 직접 확인하고 처리해야 했고 우편 접수가 병행되었다. 이로 인해 몇몇 지자체는 신청 후 두 달이 지나서야 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디지털청의 탄생과 현실적 한계

이런 혼란 속에서 2021년 9월 출범한 것이 일본의 '디지털청'이다. 당시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이 조직을 통해 국가 전체의 디지털화를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출범 초기부터 디지털청은 관료조직 간의 칸막이 구조와 외주 의존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디지털청의 핵심 업무 중 하나였던 '마이넘버'(일본의 주민식별번호 제도)는 여전히 각종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2024년 현재 마이넘버 카드 보급률은 전체 인구수 대비 70%에 달하지만, 실제 활용도는 카드 보유율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2023년에는 마이넘버 관련 시스템 오류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타인의 보험정보나 연금정보가 잘못 연결되는 오류가 다수 발생하면서 국민 불신이 더욱 커졌다. NTT 도코모와 후지쯔 등의 독점적 수의계약 구조로 인해 투명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전산화와 디지털화는 다르다

일본 정부는 오래전부터 '행정 전산화'를 추진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문서의 전산 입력, 공문서 전자보관 등이 도입되었지만, 이는 '디지털 정부'라기보다는 단순한 전산 기록 시스템에 가깝다. 문제는 시스템 간 연계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민기록, 건강보험, 세무정보, 연금 시스템이 각각 다른 데이터베이스로 운영되며, 기관 간 정보 공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면 한국은 OECD에서 2019년에 처음으로 실시한 디지털정부평가에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에스토니아와 함께 하나의 디지털 ID로 각종 정부 서비스를 통합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일본도 유사한 통합을 시도했지만, 부처 간 이권 다툼과 개인정보 유출 우려 등으로 인해 시스템 통합은 지지부진하다. 정확한 OECD 디지털 정부 지표에서의 일본 순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여러 디지털 정부 관련 국제 평가에서 일본은 선진국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지털화는 기술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

일본은 IT 기술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다. 민간 기업의 수준은 세계적이며, AI·클라우드·IoT도 일부 산업에서는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문제는 행정 시스템의 구조다. 디지털화란 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기존 업무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고,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해야 비로소 효율과 신뢰가 따라온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종이 문화와 부처 간 위계 중심의 관료제도가 강하게 남아 있다. 공공 시스템은 대부분 외부 민간업체에 발주되며, 이 과정에서 기술적 통제권이나 유지보수 역량이 정부 내부에 축적되지 못한다. 예산은 반복적으로 소모되지만, 시스템 자체는 몇 년 전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다.

닛케이신문은 "회의가 너무 많다. 더 이상 나가고 싶지 않다" "같은 서류를 여러 번 만들고 있다"는 민간 출신 디지털청 직원의 불만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는 디지털청조차 기존 관료제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한계와 과제

일본의 디지털화 지연에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첫째,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과도한 우려가 시스템 통합을 가로막고 있다. 둘째, 부처 간 칸막이 행정으로 인해 통합적인 정책 추진이 어렵다. 셋째, 특정 기업들의 독점적 수의계약 구조로 인해 혁신적인 솔루션 도입이 제한된다.

2025년에는 마이넘버 카드 대규모 갱신 사태가 예상되는 상황으로,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일본의 디지털화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행정 신뢰의 위기, 부처 이기주의, 비효율적인 조직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다. 기술 강국이라는 허상 뒤에 숨은 디지털 행정의 후진성은 이제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한국이 디지털 정부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로 부상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여전히 20세기적 행정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스템의 혁신은 단순한 도입이 아니라, 구조의 재설계에서 출발한다. 일본이 진정한 디지털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접근보다는 제도적, 문화적 혁신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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