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카슈미르: 정체성의 전쟁터

엘노스 2025. 6. 12. 08:15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분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카슈미르'가 있다. 카슈미르는 단순한 영토 분쟁의 대상이 아니다. 이 지역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게 정체성의 문제이자, 민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작동해왔다. 하지만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정작 카슈미르 주민들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소외돼왔다. 

애매한 편입: 계획된 침공과 강제된 선택

1947년 영국의 철수 이후, 인도 대륙에 속했던 약 560개의 자치 영주국은 각자 인도 혹은 파키스탄에 편입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곳이 바로 히말라야 서북부의 잠무-카슈미르 왕공국이었다. 1941년 영국 인도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슈미르는 무슬림 77%, 힌두교도 20%, 불교도와 시크교도가 나머지 3%를 차지하는 무슬림 다수 지역이었지만, 국왕 하리 싱은 힌두교도였다.

하리 싱은 주 내 무슬림들은 인도로의 편입에 불만을 가질 것이고,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파키스탄에 가입할 경우 입지가 취약해질 것으로 예상해서 독립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과 현상유지 협정에 서명했고 인도에도 같은 협정을 요청했지만, 인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의 독립 상태를 용인할 의사가 없었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파키스탄군은 이미 8월 20일 '굴마르그 작전'을 수립하여 부족 침공을 조직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파슈툰 부족민 1,000명씩으로 구성된 20개 라시카르(부족 민병대)를 9월 첫째 주까지 바누, 와나, 페샤와르, 코하트, 탈, 노쉐라의 여단 본부에서 무장시키고, 10월 18일 압타바드 출발점에 도달하여 10월 22일 잠무 카슈미르로 침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1947년 10월 22일, 4,000명의 부족민을 이끈 쿠르시드 안와르가 무자파라바드 근처에서 카슈미르에 진입했다. 파슈툰 부족 공격은 무자파라바드 구역에서 시작되었고, 무자파라바드와 도멜 주변 국경 지역에 주둔하던 주 부대는 부족군에게 빠르게 패배했다 (무슬림 주 부대는 반란을 일으켜 그들에게 합류했다).

침입자들은 스리나가르로 향했지만 바라물라에 도달한 후 약탈에 몰두하며 진군이 정체되었다. 유럽 남아시아연구재단(EFSAS)의 논평에 따르면, 1947년 10월 26일 하루에만 파키스탄 침입자들이 바라물라 주민 약 11,000명을 학살하고 수도 스리나가르에 전력을 공급하던 모흐라 발전소를 파괴했다. 부족 침공으로 인한 잠무 카슈미르 주민 총 사망자 수는 35,000명에서 40,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위기 상황에서 하리 싱은 인도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인도의 총독 마운트배튼 경은 마하라자에게 인도로의 편입을 먼저 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1947년 10월 26일 하리 싱은 편입조서(Instrument of Accession)에 서명하여 잠무-카슈미르 왕공국을 인도 자치령에 가입시켰다. 10월 27일 인도군이 스리나가르로 공수되어 침입자들을 저지했다.

유엔 결의와 '주민투표'의 실종

1948년 1월 1일 인도가 유엔 헌장 제35조에 따라 이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기했다.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1949년 1월 1일 일시 정전되었지만, 카슈미르는 이미 둘로 나뉘었다. 인도는 잠무와 스리나가르를 포함한 약 55%를, 파키스탄은 길기트-발티스탄과 아자드 카슈미르를 포함한 약 30%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머지 15%는 중국이 통제하고 있다.

1948년 4월 21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 47호를 통해 주민들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 실시를 권고했다. 이 결의는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잠무 카슈미르의 인도 또는 파키스탄으로의 편입 문제가 자유롭고 공정한 주민투표라는 민주적 방법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희망한다"고 명시했다.

결의는 3단계 과정을 권고했다. 첫 번째 단계에서 파키스탄은 전투를 위해 카슈미르에 들어온 모든 자국민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받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인도는 법과 질서 유지에 필요한 최소 수준까지 군대를 점진적으로 줄일 것을 요구받았다. 세 번째 단계에서 인도는 유엔이 지명한 주민투표 관리자를 임명하여 자유롭고 공정한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 주민투표는 77년 넘게 실시되지 않았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먼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키스탄은 이를 효과적으로 거부했다. 결국 유엔 결의는 사실상 사문화되었고, 카슈미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해결 분쟁지 중 하나로 남았다.

카슈미르 주민의 제3의 목소리

카슈미르 문제의 복잡성은, 단순히 인도 vs 파키스탄의 양자 구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카슈미르 계곡은 압도적으로 무슬림(97.16%)이며 힌두교도(2.45%)와 시크교도(0.81%)는 매우 소수다. 무슬림 인구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독립을 원하는 세력, 파키스탄과의 합병을 원하는 무슬림 공동체, 그리고 인도 내 자치권 유지를 선호하는 주민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3의 목소리는 양국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파키스탄은 '형제 무슬림' 담론을 내세웠지만 카슈미르의 다원적 정치 현실을 외면했고, 인도는 분리주의로 간주하며 강경한 통제를 유지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의 무장 투쟁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개입은, 카슈미르 주민 전체를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하는 위험한 담론을 확산시켰다.

카슈미르 계곡의 종교 다원주의 전통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불교, 힌두교, 카슈미르 시바교, 그리고 나중에 수피즘이 동시에 번영했던 카슈미르의 초기 역사는 현재의 종교적 갈등과 모순된다.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왕조에 의해 이식된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도 불구하고 카슈미르 공동체 간의 공존은 일반적으로 조화롭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1947년 분단 과정에서 카슈미르의 인구구성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947년 8월부터 11월까지 잠무에서 무슬림 대학살이 예정된 계획에 따라 발생했다. 이 계획은 당시 잠무 카슈미르의 도그라 통치자, 광신적 힌두 단체들,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고안한 것이었다. 호레이스 알렉산더가 1948년 1월 16일 더 스펙테이터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20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했고, 이안 스티븐스는 50만 명이 살해되고 20만 명이 실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학살과 무슬림들의 대규모 탈주로 인해 잠무에서 무슬림은 61%의 다수에서 30%의 소수로 전락했다.

 

370조 폐지와 인도 내부의 재구성

2019년 8월 5일, 인도 모디 정부는 헌법 370조를 폐지하며, 잠무-카슈미르의 특별 자치 지위를 박탈했다. 370조는 1950년 인도 헌법이 발효될 때 포함되었으며, 잠무 카슈미르가 자체 헌법, 별도의 깃발, 국방·외무·통신을 제외한 모든 문제에 대한 내정 자치권을 갖도록 허용했다.

2019년 모디 정부는 또한 카슈미르를 두 연방 직할지로 분할했다 - 서쪽의 잠무와 카슈미르(입법부 보유), 동쪽의 라다크(뉴델리 직접 통치).

이 결정은 통신선 차단(5개월간 지속), 수천 명의 추가 보안군 배치, 여러 주요 카슈미르 정치인들의 구금 등 민간 자유의 광범위한 침해로 이어졌다. 정부 관리들은 이러한 제한 조치들이 폭력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 차단은 세계에서 가장 긴 통신 차단으로 기록되었다. 2020년 1월에 2G 인터넷이 복구되었지만 소셜미디어 접근은 차단되었고, 2021년 2월 5일에야 4G 인터넷 서비스가 완전히 복구되었다. 이는 18개월간 지속된 것이다.

2023년 12월 11일, 인도 대법원 5명의 헌법 재판부는 만장일치로 헌법 370조 폐지의 합헌성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370조는 전쟁 상황으로 인한 임시 조치였다"며 잠무 카슈미르가 별도의 자치권 없이 다른 인도 주와 같은 주권으로 "적절한 시기에" 복원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주권'의 상징으로서의 카슈미르

카슈미르는 실질적인 전략 요충지이자, 양국 모두에게 정치적 상징 자산이다. 힌두 민족주의 BJP는 "인도를 근본적으로 힌두 국가로 보고" 특별한 특권을 가진 "무슬림 다수 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모디 총리와 다른 BJP 지도자들은 370조와 35A조가 카슈미르 번영의 장애물이었으며,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왕조 정치와 부패"를 조장하며 이 지역에서 "테러리즘과 분리주의"를 키웠다고 주장해왔다.

파키스탄에서는 카슈미르 문제가 '미완의 분단'이라는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여겨지며, 인도에서는 다문화적 통합의 실험이자 안보의 최전선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바로 그 '상징성' 때문에, 정작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 대리전의 인질로 취급되어 왔다. 2019년 이후 최소 262명의 군인과 171명의 민간인이 2019년 2월 풀와마 테러 공격을 포함해 690건 이상의 사건으로 사망했다. 1989년부터 무장 반란을 견뎌온 카슈미르 계곡이 무장세력 관련 폭력으로 계속 들끓고 있는 가운데, 테러의 무대는 이제 평화로웠던 잠무 지방까지 확장되었다.

현재적 의미와 국제적 맥락

한편 파키스탄 관할 카슈미르도 2024년 자체적인 대규모 시위로 흔들렸는데, 이는 370조 폐지로 부분적으로 악화된 파키스탄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 때문이다. 


경계획정위원회가 인구가 더 많은 카슈미르 계곡에는 1석만 늘려 기존 46석에서 47석으로 하는 반면, BJP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힌두 다수 잠무 지역에는 37석에서 43석으로 더 많은 의석을 배정하고 있어, 사실상 입법부 내 권력 균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카슈미르는 단지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분쟁 그 자체를 구성하는 상징의 공간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게 민족의 자존을 상징하는 이 땅은, 그러나 정작 거기 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종교적 다원주의의 깊은 전통을 가진 카슈미르에서, 불교, 힌두교, 카슈미르 시바교, 수피즘이 동시에 번영했던 역사는 현재의 갈등이 얼마나 인위적인지를 보여준다.

1947년 파키스탄의 계획적 침공과 그에 따른 강제 편입, 수만 명의 민간인 학살, 그리고 77년간 지속된 분할 상태는 급작스러운 탈식민화 과정의 비극적 산물이다. 유엔 결의안이 77년째 이행되지 않는 현실, 2019년 일방적인 자치권 박탈과 18개월간의 인터넷 차단, 그리고 지속되는 인구구성 변경 시도들은 이 문제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선 복잡한 정치적 구조물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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