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1시즌 2/3> 공정한 게임의 허상

<오징어 게임>의 모든 룰은 단 하나의 명제를 전제로 한다. "게임은 공정하다." 게임을 운영하는 자들은 반복해서 이 말을 강조하며, 참가자들에게도 그 말은 일종의 안도감을 준다. 최소한 이 안에서는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그 공정성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이 시리즈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대상은 '불공정한 현실'이 아니라, '공정함이라는 신화' 자체다.
구조적 불평등의 복제
게임은 표면적으로는 평등하다.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규칙 아래, 같은 게임에 참여하며, 선택은 자유의지에 맡겨진다. 하지만 현실의 계급은 게임 안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3단계 줄다리기에서 이는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팀을 고를 때, 누군가는 힘센 사람을 찾고, 누군가는 말이 통하는 사람, 혹은 그냥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로 손을 잡는다. 일남은 체력적으로 가장 약한 존재로 여겨져 아무도 선택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기훈이 그와 팀을 이뤘다. 미녀(김주령)는 자신을 선택한 덕수가 사망한 후 혼자 남겨져 게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 이전에 구조적인 조건이 승부를 좌우한다. 이는 오늘날 노동시장과 금융시장에서 흔히 보이는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가 출발선은 같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가진 것'에 따라 결과가 예측되는 구조. 게임은 그저 그 불평등을 비극적으로 극화할 뿐이다.
구슬치기와 배신의 윤리
6화 '깐부' 에피소드는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4단계 구슬치기 게임은 1대1로 짝을 이루고, 둘 중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룰을 제시한다. 그 순간, '동료'는 '적'이 된다.
기훈은 치매 증상을 보이는 일남을 속이고, 상우는 순진한 알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새벽과 지영은 서로의 사연을 털어놓은 후, 지영이 스스로 구슬을 포기하며 새벽에게 승리를 넘겨준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는 개인의 윤리와 생존의 논리를 정면 충돌시킨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기훈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거짓말을 후회하며 말을 잇지 못했고, 일남은 "우린... 깐부잖아."라며 마지막 구슬을 기훈에게 건네준다. 공정함은 이 게임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어떤 도덕도, 신뢰도, 정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결과만 남는다.
VIP의 시선
7화부터 등장하는 'VIP'들은 게임의 진짜 정체를 드러낸다. 황금으로 장식된 동물의 가면을 쓴 이 익명의 후원자들은 이 모든 게임을 관전하는 이방인의 위치에 서 있다. 그들은 언어도, 국적도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보는 자'이며 '지배하는 자'다.
이들의 존재는 단순한 스폰서가 아니다.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자산과 권력을 독점한 글로벌 엘리트들의 풍자다. 그들에게 참가자들의 고통은 단지 '엔터테인먼트'이며, 인간의 삶은 내기를 위한 판돈일 뿐이다. 실제로 외국인 VIP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는 해외 시청자들로부터 "끔찍했다", "오글거렸다"는 혹평을 받았고, 일부 배우는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VIP들이 '공정함'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게임의 진행이 공정하지 않으면 불쾌해하고, 누군가 규칙을 어기면 분노한다. 5화에서 장기매매가 발각되자 프론트맨이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모두 평등한 존재"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그 공정함은 언제나 자신들이 게임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공정함은 자신들이 직접 감당할 필요 없는,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왜 이 모든 게 '게임'이라는 형식인가
<오징어 게임>은 왜 하필 '게임'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이 형식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가장 극단적으로 요약해주기 때문이다. 경쟁은 일상화되었고, 결과로만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며, 실패한 자는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한 분석에 따르면, 청년 세대가 민감해하는 공정성은 절차적 공정성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결과를 떠나서 그 과정이 얼마나 공정한가의 문제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정치적 모토가 어느 순간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면 결과는 정의롭다"는 명제로 변모했다. 그렇게 과정의 공정성만 보장되면 개인이 오롯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안게 되었다.
"공정한 게임"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 섬뜩하다. 이 말은 우리 현실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입시, 취업, 주식, 창업—무수한 경쟁의 장은 언제나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출발선조차 다르고, 규칙조차 누군가에겐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영국 가디언은 "오징어 게임의 배경이 오늘날 한국의 상당히 실질적인 부의 불평등에 있다"며 이와 가까운 사례로 계급 갈등이 잔혹한 결론으로 이어진 영화 '기생충'을 거론했다. 세계 28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33%가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자신이 속한 국가의 가장 큰 걱정거리로 꼽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오징어 게임>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모든 불공정함을, 게임이라는 익숙한 형식을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드라마의 전 세계적 성공은 단순한 오락의 승리가 아니라, 전 지구적 불평등에 대한 공감의 증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