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연준: 디지털 통화 시대의 중앙은행

100여 년간 지폐와 금리로 경제를 조율해온 연준이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을 맞고 있다. 디지털 혁명이 화폐의 개념 자체를 뒤흔들면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암호화폐, 탈중앙화 금융(DeFi)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통화 체계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러나 2025년 2월, 미국의 디지털 달러 논의는 급작스러운 종료를 맞았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상원 은행위원회에서 "연준 의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는 2026년 5월 파월 의장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CBDC 도입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수년간 신중하게 연구를 진행해온 연준의 기존 방향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연준은 2022년 1월 "Money and Payments: The U.S. Dollar in the Age of 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제목의 33페이지 분량 백서를 발표하며 CBDC의 잠재적 혜택과 위험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이 백서는 "특정 정책 결과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연준이 미국 CBDC 발행의 적절성에 대해 임박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신호가 아니다"라고 명시했지만, 적어도 디지털 달러에 대한 공개적 논의의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파월 의장의 CBDC 거부 선언은 글로벌 디지털 화폐 경쟁에서 미국이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e-CNY)는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의 CBDC 시범사업으로, 2024년 6월 기준 총 거래량이 7조 위안(9,860억 달러)에 달해 전년 같은 기간의 1조 8천억 위안(2,530억 달러)보다 거의 4배 증가했다.
중국은 이미 17개 성에서 교육, 의료,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 디지털 위안화를 적용하고 있으며, 태국, UAE, 홍콩,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mBridge 프로젝트를 통해 국경간 CBDC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달러 중심의 국제 결제 시스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다.
반면 미국은 2025년 5월 하원에서 소매용 CBDC의 직접 발행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상원에서는 아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CBDC는 여전히 진행 중인 대선 캠페인의 쟁점으로 남아있다.
축소되는 미국의 무은행 가구 문제
한편 CBDC 도입의 주요 명분 중 하나였던 금융 포용성 확대 필요성도 예상보다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무은행 가구 비율이 4.2%로 감소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약 560만 가구에 해당하며, 2011년 8.2%였던 무은행 가구 비율이 꾸준히 감소한 결과다.
특히 소수계층의 무은행 비율도 2011년 이후 절반 가까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백인 가구(1.9%)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흑인 가구 10.6%, 히스패닉 가구 9.5%, 아메리카 원주민 가구 12.2%.
무은행 가구의 66.2%는 전적으로 현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33.8%는 PayPal, Venmo, Cash App과 같은 비은행 온라인 결제 서비스나 선불카드를 이용해 거래를 처리하고 있다. 이는 민간 핀테크 서비스가 이미 상당 부분 금융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준은 CBDC 대신 기존 금융 인프라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 연준이 2019년 출시한 FedNow 결제 시스템은 24시간 실시간 은행간 송금 서비스를 제공하며, CBDC가 해결하려던 많은 문제들을 이미 다루고 있다. 파월 의장은 상원에서 FedNow 시스템의 확대를 통해 24시간 송금 서비스를 더욱 널리 이용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2023년 조사에서 전체 가구의 50%가 페이팔 등 비은행 온라인 결제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이는 2021년 46.4%에서 증가한 수치다. 모바일 뱅킹도 급속히 확산되어 은행 계좌를 보유한 가구의 48.3%가 모바일 뱅킹을 주요 계좌 접근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암호화폐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지속적 경계
연준의 CBDC 포기에도 불구하고 민간 디지털 화폐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고 있다. 2023년 조사에서 미국 가구의 4.8%가 지난 12개월 동안 암호화폐나 디지털 자산을 소유하거나 사용했으며, 이 중 92.6%는 투자 목적으로 보유했고 단 4.4%만이 결제 수단으로 사용했다.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여전히 수백억 달러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연준과 재무부는 이들에 대한 규제 프레임워크 구축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핵심은 민간 디지털 화폐가 금융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혁신을 통한 효율성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CBDC 도입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연준의 디지털 혁신은 계속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경제지표 분석, 시장 위험 모니터링, 통화정책 시뮬레이션 등은 이미 연준의 정책 결정 과정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통화정책의 정확성과 신속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중앙은행 정책결정의 민주적 정당성과 인간적 판단의 가치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점진적 혁신 vs 급진적 변화
결국 연준은 CBDC라는 급진적 혁신 대신 기존 시스템의 점진적 개선과 민간 혁신의 활용이라는 길을 택했다. 이는 기술적 가능성보다는 정치적·사회적 수용성을 우선시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파월 의장의 CBDC 거부 선언은 단순히 기술 개발의 연기가 아니라, 화폐의 본질, 중앙은행의 역할, 개인의 프라이버시, 그리고 혁신과 안정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근본적 가치 선택의 결과다.
미래의 연준은 CBDC 없이도 FedNow와 같은 기존 인프라 개선, 민간 핀테크와의 협력, AI 기반 정책 도구 활용을 통해 디지털 시대에 맞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재정의해 나가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과정에서 내린 선택들은 단지 미국뿐 아니라 CBDC를 추진 중인 다른 국가들의 정책 방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