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코카콜라 병: 아이코닉 디자인의 탄생

엘노스 2025. 7. 13. 08:02

1915년 11월 16일, 하나의 병이 미국 특허청에서 디자인 특허를 받았다. 20세기 소비문화의 가장 강력한 아이콘 중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코카콜라 병의 아이코닉한 곡선은 이후 100년이 넘도록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며,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물질로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되었다.

모방의 위협과 차별화의 필요성

1886년 코카콜라는 하루 평균 9잔 판매되는 소규모 음료였지만, 190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판매될 만큼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성공과 함께 찾아온 것은 수많은 모방품들이었다. Ma Coca-Co, Toka-Cola, Koke 등 교묘하게 로고를 바꾼 유사품들이 시장을 교란했다.

사업 초창기에는 코카콜라 사가 원액을 보급하고, 음료를 병에 담는 작업은 지역의 충전 파트너들이 맡는 구조였다. 병은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해 사용했기 때문에 형태가 단순했고, 유사하게 흉내 내기도 쉬웠다. 로고마저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코카콜라와 충전 파트너들은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차별화된 병’을 개발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1915년의 혁명적 공모전

1915년, 코카콜라의 충전 파트너들은 새로운 병 디자인을 공모하기로 했다. 조건은 명확했다. "어둠 속에서 만지거나 깨진 상태에서도 특징을 알 수 있는 디자인." 시각적 요소를 넘어서 촉각까지 고려한 이 요구는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다.

공모에 선정된 디자인은 인디애나 주 루트 유리공장에서 나왔다. 관리자 알렉산더 사무엘슨의 지휘 아래, 디자이너 얼 딘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본 카카오 열매(cacao pod)의 길쭉한 곡선과 세로 홈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형태와 기능의 완벽한 조화

1915년 특허를 받은 초기 프로토타입 병은 중간 부분이 지나치게 볼록해 생산에 어려움이 있었고, 1916년에 윤곽을 보다 날씬하게 다듬어 상업적 생산에 들어갔다.
 

1915, 코카콜라의 특허 등록된 곡선 병, 코카콜라 컴퍼니 컬렉션



조지아 그린과 정체성의 구현

엷은 녹색을 띠는 코카콜라 병은 훗날 ‘조지아 그린(Georgia Gree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유리를 만들 때 사용된 광물 조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색조였고, 애틀랜타라는 브랜드의 뿌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당시 병 바닥에는 해당 병을 생산한 도시의 이름이 새겨졌는데, 아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병을 비교하며 누가 더 먼 도시에서 온 병을 가졌는지를 두고 경쟁하는 놀이가 퍼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소비자와 브랜드 사이의 감정적 연결을 만들어내는 의외의 효과를 낳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은 병사들에게 위생적인 음료를 제공하기 위해 코카콜라를 공급했다. 이에 따라 코카콜라는 전 세계 60여 개국에 음료 충전 공장을 설립하며 글로벌 유통망을 빠르게 확장했다. 당시 회장 로버트 우드러프는 “미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병당 5센트에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게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코카콜라는 전쟁 중 단순한 음료를 넘어 '고향'과 '미국적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이후 평화 시대에는 미국의 풍요와 자유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기능했다.
 
앤디 워홀과 코카콜라
 
앤디 워홀은 『앤디 워홀의 철학』(1975)에서 “미국의 위대함은 대통령이든 엘리자베스 테일러든, 혹은 길거리 부랑자든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점”이라고 썼다. 부유하다고 더 나은 콜라를 마실 수 없고, 가난하다고 덜한 것을 마시는 것도 아니라는 발상은 코카콜라 병이 평등한 소비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워홀은 1962년 ‘Green Coca-Cola Bottles’를 포함해 15개 이상의 작품에서 이 병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코카콜라 병은 워홀에게 있어 평등과 대량소비, 반복 가능성을 상징하는 미국 문화의 핵심 오브제였다. 이 작품은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약 3536만 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Andy Warhol, Green Coca-Cola Bottles 1962


코카콜라 병은 ‘호블스커트 병’, ‘메이 웨스트 병’, ‘컨투어 병’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이 물체는 단순한 포장을 넘어 감정을 담고 기억을 자극하는 ‘존재’로 자리잡았다.

코카콜라 병은 곡선 형태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따라 재료나 구조를 유연하게 변화시켜왔다. 1950년대 이후 페트병과 알루미늄 병이 도입되었지만, 본래의 실루엣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로고 역시 병과 함께 진화해왔다. 창업자 존 펨버턴 박사의 회계사였던 프랭크 로빈슨이 1886년 스펜서체로 디자인한 로고는 한 세기 이상 동일한 서체를 유지해왔으며, 1969년에는 하얀 곡선이 포함된 '다이나믹 리본 디바이스'가 등장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병과 로고의 조화를 완성했다.

소비사회의 미래를 예견하다

코카콜라 병은 20세기 소비사회의 핵심 딜레마를 요약한다.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제품을 제공하면서도, 소비자는 그 병에 각자의 경험과 감정을 투영한다. 더운 여름날의 갈증, 첫 데이트의 설렘, 해외여행의 자유—다 같은 병이지만 전혀 다른 기억들이다.

코카콜라 병은 단순히 미국 문화를 수출한 상징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고 재구성된 글로벌 오브제였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에 처음 유통된 이후 자유와 풍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지금은 일상 속 음료가 되었지만 여전히 특정 세대에겐 특별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코카콜라 병은 단순한 패키징을 넘어선 문화적 상징이자, 산업디자인과 브랜드 전략이 결합된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로 남았다. 모방을 막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서 출발한 이 곡선은 촉각적 인식, 미적 조형성, 문화적 상징성을 모두 포괄하는 아이콘으로 진화했다.

로고나 광고가 아닌, 제품 그 자체의 형태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한 이 병은 이후 수많은 브랜드 디자인에 길을 열어주었다. 기술이 변해도, 그 곡선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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