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러시아 자본주의의 두 얼굴

엘노스 2025. 7. 11. 16:30

1990년대 러시아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대규모의 민영화 실험을 겪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국영기업의 자산은 헐값에 민간에 넘어갔고, 극소수의 사업가들이 거대한 에너지·금속·금융 자산을 장악했다. 이들은 '올리가르히'(Oligarch)라 불리며, 새로운 러시아의 권력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부패와 무질서, 불평등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0년대 푸틴 집권과 함께 러시아 정부는 이들을 '통제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고, 결국 국가 중심의 경제 질서를 재구축하게 된다. 그 전환의 핵심 사건이 바로 유코스 사태다.

1990년대: 올리가르히의 탄생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급진적 시장 개혁, 이른바 '쇼크 요법(shock therapy)'을 도입했다. 국영기업 수천 개가 민간에 넘어갔고, 은행과 언론도 신흥 기업가들 손에 들어갔다. 

이 시기 대표적인 올리가르히들은 다음과 같다: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유코스 석유회사 회장으로, 1963년 6월 26일 출생한 유대인 출신으로 모스크바 멘델레예프 화공대학교를 졸업 후 1989년 메나테프 은행을 설립했다
- 로만 아브라모비치: 시브네프트 석유회사를 경영하며 후에 영국 첼시 FC 구단주가 됨
-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NTV 설립자이자 미디어 재벌
-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로고바자 그룹 회장으로 항공·석유·미디어 사업을 전개

이들은 불투명한 '담보경매(loans-for-shares)' 방식으로 자산을 확보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루블 폭락 속에서 헤지와 차익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들 재벌은 단지 경제인에 머물지 않았다. 1996년 옐친 대통령 재선에서 이들은 자금을 지원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작했으며, 정부 요직 인사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베레조프스키는 옐친의 후계자로 푸틴을 추천하고 지원하기도 했다.

푸틴의 초기 경제 전략: 타협에서 통제로

2000년 대통령에 취임한 푸틴은 초기에 올리가르히들과 일종의 거래를 제안했다. 2000년 7월 크렘린궁에서 21명의 주요 올리가르히들을 불러 모아 "법을 준수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한, 재산권은 보장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는 재벌들과의 일시적 타협이었지만, 동시에 권력 관계의 주도권을 국가가 쥐겠다는 암묵적 경고이기도 했다. 푸틴은 KGB 출신다운 방식으로 이른바 '체계의 복원'을 시도했으며, 그 첫 대상이 된 것이 바로 미하일 호도르콥스키였다.

호도르콥스키는 유코스 석유회사의 회장이자 러시아 최고 부자 중 한 명이었다. 2003년 기준 그의 재산은 150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그는 단지 에너지 재벌이 아니라, NGO 설립, 야당 정치인 후원, 헌법 개정 비판 등 공공영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푸틴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었다.

유코스 사태: 푸틴의 역습

2003년 10월, 호도르콥스키는 사기, 횡령, 탈세 등 7개 혐의로 체포된다. 검찰은 유코스의 주식 거래와 세금 회피 구조를 문제 삼았고, 유코스 본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어졌다. 

2004년 4월에 처음으로 34억 달러의 체납 세금을 강제 추징했고, 곧이어 추가 세무조사를 통해 총 납세부담액은 240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는 유코스의 매출액보다 많은 액수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납부가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핵심 자회사인 유간스크네프테가스가 2004년 11월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티의 바이칼 파이낸스그룹에 93억 7천만 달러에 매각되면서 유코스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결국 경영 공백, 추징금 부과, 핵심 자회사의 헐값 매각이라는 삼중고에 빠져 2006년 8월 1일 완전히 파산했다.

호도르콥스키는 2005년 9년형을 선고받았고, 추가 혐의로 형이 연장되어 총 10년 이상 수감되었다. 2013년 12월 20일 푸틴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어 독일로 출국했다.

이는 단지 한 기업인의 범죄 수사가 아니라, 올리가르히에 대한 체계적인 권력 박탈로 읽혔다. 이후 구신스키는 횡령 등의 비리 혐의로 감옥에 갔다가 NTV 주식을 가즈프롬에 3억 달러에 판매 후 스페인으로 망명했고, 베레조프스키는 **2013년** 영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국가자본주의 모델의 부상

푸틴 정권은 유코스 해체 이후 에너지 산업을 중심으로 국유기업을 강화해갔다. 로스네프트는 석유 산업에서, 가스프롬은 천연가스와 송유관 인프라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국영 기업들은 단순한 생산자이자 수출업체를 넘어서, 국가의 지정학 전략을 수행하는 도구가 되었다.

옐친 시대 핵심 올리가르히들로 구성된 '세미반키르시나(7개 은행가 집단)'는 1996년에서 2000년 사이 러시아 금융의 50-70%를 통제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스프롬은 유럽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며, 우크라이나·벨라루스·독일 등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협상 카드가 되었다. '에너지 무기화' 전략은 러시아의 대외정책에서 핵심 도구가 되었고, 이는 이후 2006년 우크라이나 가스 차단 사태, 2014년 크림 사태, 2022년 유럽 에너지 위기까지 연장된다.

'친정부 재벌'의 등장과 신종 올리가르히

유코스 사태 이후, 모든 재벌이 숙청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신흥 재벌들이 부상했다. 이른바 '푸틴의 친구들'이다:

 

서울신문 자료


이들은 기존 올리가르히와 달리 독립적 정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국가 권력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즉, 부의 축적은 가능하지만, 권력의 위협이 될 수 있는 독자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복종을 조건으로 한 재산권이라는 푸틴식 계약 모델이다.

시장경제와 권위주의의 결합

푸틴의 경제 정책은 형식상 시장경제를 유지하지만, 실질은 국가 통제 아래 운영되는 '국가자본주의 모델'이다. 이는 고전적 시장경제와 달리, 정치 충성도가 기업 활동의 핵심 변수로 작용하는 구조다. 투자, 인허가, 언론 노출, 해외 수주 등 모든 과정에서 국가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이 체제는 2000년대 유가 호황 덕분에 안정적으로 작동했지만, 이후 국제 제재와 내수 위축, 기술 자립 실패 등으로 한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 체제는 여전히 이 모델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안정'이 '경제 효율성'보다 우선하는 통치 논리를 반영한다.

유코스 사태는 푸틴 체제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국가주도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분기점이었다. 이는 단지 경제 시스템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게임의 규칙 자체가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러시아에서 경제는 더 이상 시장만이 아니라, 크렘린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가 되었다.

호도르콥스키의 사례는 러시아에서 부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는 현재도 유럽에서 러시아 민주화 운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푸틴 체제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는 대표적 인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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