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대혁명과 퇴폐예술 전시회

엘노스 2025. 7. 5. 07:18

20세기 중반, 독일과 중국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 속에서 예술을 제한하고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나치 정권은 1937년 퇴폐예술 전시를 통해 현대 미술을 조롱했고, 중국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이어진 문화대혁명을 통해 전통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했다. 두 사건은 각각 파시즘과 공산주의 체제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국가가 특정한 이념을 기준 삼아 예술과 문화, 지식의 경계를 정하고 배제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전시와 폭력

퇴폐예술 전시는 1937년 7월 19일 독일 뮌헨의 호프가르텐에 있는 고고학 연구소에서 시작되어 전국 순회 전시로 이어졌다. 전시된 작품은 32개의 독일 미술관에서 압수한 650점의 미술작품이었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막스 베크만, 오토 딕스, 조르주 그로츠 등 당시 표현주의, 다다이즘, 추상미술 경향에 속한 작가들이 대상이 되었다.
 



벽에 걸린 작품들 곁에는 "이것이 당신의 세금으로 구입된 예술인가", "정신병자의 낙서" 같은 문구가 함께 붙었다. 관람객은 200만 명이 넘었고, 같은 시기 히틀러가 열었던 "위대한 독일 미술 전시"의 42만 명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렸다. 공식적 메시지는 비정상적인 예술을 경계하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배척하는 예술가와 사상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고 모욕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중국 문화대혁명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의 5·16 통지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사구타파" 운동, 즉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四舊)의 제거를 선언했고, 홍위병이라는 이름의 청소년 조직들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사찰, 유물, 서점, 서원, 예술기관을 습격했다.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베이징고궁박물관 등은 수차례 훼손 대상이 되었고, 산둥성 취푸의 공자묘에서는 1966년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석비 6,618개가 파괴되고 2,000개의 무덤 파손 시도가 있었다.

중국 전통 연극인 경극은 마오의 부인 장칭 주도로 혁명 경극으로 개편되었으며, 전통 악기 연주나 유교적 소재의 공연은 금지되었다. 미술과 문학도 모두 당의 선전 노선을 따라야 했고, 고전 회화나 서예는 봉건의식으로 간주되었다. 

예술가에 대한 배제와 처벌

퇴폐예술 전시에 포함된 작가 중 상당수는 독일을 떠나거나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막스 베크만은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파울 클레는 스위스로 이주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1937년 자신의 작품이 퇴폐예술 전시에 포함되고 작품 전시와 거래가 금지된다는 통보를 받은 후 깊은 충격에 빠져 1938년 자살했다. 

작품은 대부분 몰수되거나 판매, 파기되었다. 전시 이후 나치는 약 1만 6천 점의 작품을 압수했고, 그중 4천 점 이상이 1939년 5월 베를린 소방서에서 소각되었고, 약 2천 점이 1939년 6월 뤼체른에서 열린 경매를 통해 해외로 흘러나갔다.

중국에서는 시인 아이칭이 1966년 비판대에 올라 베이징 시내에서 줄에 묶인 채 끌려다니는 수모를 겪었고, 이후 신장으로 하방되어 노동에 동원되었다. 화가 우관중은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벽보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작곡가 두밍신, 서예가 리커란, 연극인 쑨웨이쥔 등도 모두 비판 대상이 되었으며, 일부는 수감되거나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창작이 허용된 예술은 혁명서사를 담은 작품뿐이었다. 대표적으로 "백모녀", "홍등기" 등 8개의 양판희극만이 전국에서 반복 상연되었고, 영화, 음악, 미술 모두 이 작품들의 변주와 해설로 대체되었다.

검열 방식과 대중 동원의 유사성

두 사건은 모두 국가 차원에서 이념적 적합성을 기준으로 예술을 선별했고, 검열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 대중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가진다. 독일의 전시는 단순히 정부 문서나 공문을 통한 금지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 관람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되었고, 혐오를 유도하는 문구와 연출이 함께 동원되었다.

중국의 경우, 비판 대상이 된 예술가들은 거리에서 자아비판을 강요받았고, 종종 학생들이 교사를 구타하거나,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는 사례도 있었다. 예술 작품이나 문학 서적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고, 이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한 집회 속에서 이루어졌다. 단속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정화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수행을 유도한 사건이었다.

사건 이후의 여파

퇴폐예술 전시는 이후 나치가 예술을 장악하는 시작점이 되었으며, 독일 미술계는 1945년 이후까지도 그 영향을 받았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의 현대미술 컬렉션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일부 작품은 미국과 영국 박물관으로 흘러들어갔다. 전후 독일에서는 잃어버린 미술 복원 작업이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중국의 경우, 문화대혁명은 1976년 10월 6일 문혁사인방의 베이징정변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덩샤오핑 체제에서 "당, 국가, 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로 공식 규정되었다. 1980년대 들어 예술 활동이 점차 회복되었지만, 전통 예술 유산 중 상당수는 복원 불가능한 상태로 남았고, 수많은 예술가는 생애의 절반을 침묵 속에서 보내야 했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체제와 시기에서 벌어진 것이지만, 이념이 예술의 경계를 규정하고 예술가를 검열하는 방식은 일정한 구조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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