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 공장 없는 산업
K-뷰티는 어떻게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보통은 브랜드의 창의성, 제품력, 마케팅 능력을 떠올리지만, 그 이면에는 오히려 '없는 것'이 중요한 변수였다. 한국 화장품 산업은 오랫동안 자체 제조시설 없이도 성장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 구조 자체가 경쟁력의 일부로 작동해왔다. 이른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과 ODM(제조자 개발 생산) 중심의 산업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화장품 회사 다수는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 대기업부터 중소 브랜드까지 대부분은 코스맥스, 한국콜마, 인터코스 같은 대형 제조업체에 생산을 위탁한다. 2024년 코스맥스는 연 매출 2조 1,661억 원을 기록하며 글로벌 ODM 업계 1위를 유지했고 한국콜마는 유사한 수준의 매출을 달성했다.
국내 화장품 OEM ODM 관련 108개 업체의 전체 매출액은 2021년 7조 2,547억 원에서 2023년 8조 6,695억 원으로 증가해 13.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들 제조업체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화장품 OEM/ODM 시장 규모는 2022년 456억 달러에서 2030년까지 673억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 기간 연평균 성장률(CAGR)은 약 6.8% 수준이다.
브랜드는 기획과 마케팅에 집중하고, 제조는 외주에 맡기는 방식이다. 특히 ODM 모델에서는 제조사가 제품 개발까지 함께 담당하므로, 브랜드는 극단적으로는 아이디어만으로도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빠른 시장 대응의 양날의 검
이 구조의 장점은 빠른 시장 대응이다. 신제품 주기가 짧고 트렌드 변화가 빠른 K-뷰티 시장에서, 자체 공장을 돌리며 생산 유연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OEM 모델에서는 수천 개의 신제품 포뮬러가 이미 준비돼 있어, 브랜드는 이를 조합하거나 포장만 달리해서 빠르게 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최근 K-뷰티의 글로벌 성장을 뒷받침했다. 2024년 한국 화장품 수출액은 102억 달러로 전년 대비 20.6% 증가하며 사상 처음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중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66.4% 이상으로 추정된다.(KOTRA 2024 자료)
차별화의 실종과 구조적 문제
문제는 이 구조가 브랜드 간 제품의 실질적 차이를 흐릿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화장품들이 실은 거의 같은 공정, 같은 포뮬러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는 디자인이나 마케팅 언어, 또는 연예인 모델의 얼굴을 통해 선택하지만, 실제 내용물의 차이는 크지 않다.
해외 수입사가 재구매보다 OEM을 요구해 이를 대행하다 보니, 수익성은 떨어지고 브랜드 본연의 방향성을 잃는 경우도 있다. 브랜드가 아닌 제조사가 품질을 좌우하는 산업 구조 속에서, 개별 브랜드의 정체성은 점점 더 모호해진다.
OEM 중심 모델은 산업의 독립성과 기술 내재화를 저해할 수 있다. 연구개발 인력과 생산 기술은 제조사에 집중되고, 브랜드는 마케팅과 유통만 강화하는 흐름이 되기 쉽다. 2020년대 들어 D2C(Direct to Consumer) 기반 인디 브랜드가 빠르게 늘었지만, 이들 역시 대부분 제조는 외주에 의존한다.
결과적으로 시장에 유통되는 브랜드 수는 늘었지만, 기술적 토대는 몇몇 대형 OEM에 집중된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코스맥스, 한국콜마, 코스메카코리아, 잉글우드랩 등 상위 10개 업체의 매출액 합계는 2024년 기준으로 국내 OEM/ODM 기업 전체 매출의 약 64.3%를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트렌드 속 한국의 위치
이런 구조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소비재 산업은 브랜드와 제조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 화장품 위탁산업 규모는 2014년 298억 위안에서 2021년 573억 위안으로 증가했다. 화장품 소비시장 확대에 따라 위탁생산 산업도 동반 성장 중이다.
하지만 K-뷰티의 경우 브랜드 수명 주기가 짧고 가격 경쟁이 심한 데 비해, 기술 독립이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조적 불안정성이 크다. 특히 해외 시장에서의 가격 인하 압력은 한국 화장품 산업을 점점 더 원가 중심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중소 화장품 수출기업들은 ‘제조업자 표기 삭제’를 위한 화장품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식약처는 업계 갈등을 이유로 이를 유보하고 있다.
콘텐츠 중심 산업으로의 변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K-뷰티 브랜드는 끊임없이 탄생하고, 자주 성공을 거둔다. 이는 OEM 시스템이 제공하는 저비용·고속 생산 기반 덕분이다. 2024년 기준 주요 커머스 플랫폼에서 K셀러 가운데 뷰티 카테고리의 매출 증가율은 패션, 푸드, 헬스를 앞질렀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을 통한 뷰티 콘텐츠 유통은 브랜드에 필요한 최소한의 진입 장벽조차 낮췄다. 소비자는 브랜드의 규모나 역사보다는 패키지와 스토리텔링을 먼저 접하게 되고, 제품의 실제 구성은 뒷전이 되기 쉽다. 이른바 ‘껍데기 산업’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OEM은 자본과 인프라가 부족한 창업자에게 진입 장벽을 낮추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부 인디 브랜드는 20% 이상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작년 대비 50% 이상의 성장률을 달성한 사례도 있다. 연간 1,000억 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브랜드가 등장할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문제는 이 모델이 반복되면서, 화장품 산업이 '상품' 중심이 아니라 '콘텐츠' 중심, 또는 '룩앤필' 중심의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품질과 기술은 브랜드 정체성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과제
K-뷰티는 빠르게 움직이고, 반응하고, 순환하는 시장이다. 그러나 그 순환이 구조의 반복에 불과하다면, 언젠가는 지치고 닳게 된다. 공장이 없는 산업이라는 말은 단지 외주 생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내면화 없이 이미지로만 버티는 산업 구조, 바로 그 얇은 기반을 의미한다.
일부 기업들은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코스맥스는 OBM(제조자 브랜드 개발 생산) 사업을 본격화하며 수익 모델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고, 한국콜마 역시 기술 내재화와 ESG 경영 강화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