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로열의 무게: 국가 브랜드가 된 발레

엘노스 2025. 6. 20. 18:33

 

로열 발레단의 역사는 19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일랜드 출신의 니네트 드 발루아가 런던에서 '아카데미 오브 코레오그래픽 아트(Academy of Choreographic Art)'를 설립한 것이 시초였다. 1931년 그는 이 학교를 새들러스 웰스 극장으로 이전하며 '빅-웰스 발레 스쿨'로 변경했고, 동시에 빅 웰스 발레단을 창설했다.

드 발루아는 무용단을 만든 것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학교와 레퍼토리 시스템을 함께 구상했다. 프랑스나 러시아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 발레 중심 국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국 안에 새로운 '국립 발레 생태계'를 만들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1956년 10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로열 차터(Royal Charter)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으며, 로열 발레단과 로열 발레 스쿨로 재탄생했다. 이 문서는 단순한 명예나 칭호가 아니라, 국가가 해당 기관을 공공 목적의 조직으로 공식 인정하고 일정한 자율성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하는 법적 장치다. 


차터 부여와 함께 로열 발레단은 거버너스 제도를 도입했다. 이들은 조직의 미래를 보호하고, 드 발루아가 확립한 예술적 전통을 계승하는 역할을 맡았다. 무용수 개개인도 단순한 예술인이 아니라 국가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발레단은 왕실 행사, 대관식, 국빈 연회 등에서 상징적 역할을 수행했다. 1957년에는 마가렛 공주가 로열 발레단의 초대 회장직을 맡고, 엘리자베스 2세는 후원자로 이름을 올렸다. 왕실과의 관계는 이로써 제도화되었고, 발레는 예술과 권위가 결합된 형태로 영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왕립 예술 체계의 작동 원리

예술 단체에 '왕립'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하나의 문화 제도로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로열 발레단은 왕실 행사, 대관식, 국빈 연회 같은 국가적 의례의 일부로 참여했고, 무용수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등장했다. 예술과 권위가 긴밀히 얽히는 구조 속에서, 발레는 영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연출하는 주요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와 같은 '왕립 예술 체계'는 발레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로열 오페라,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로열 칼리지 오브 뮤직 등도 모두 왕실의 후원을 받는 예술 기관들이며, 영국은 이들을 통해 국가 브랜드를 구축하고 관리한다. 

혼합 모델의 재정 구조

로열 발레 및 오페라는 아츠 카운슬 잉글랜드(Arts Council England)로부터 연간 약 2,360만 파운드(2022-23년 기준)의 공적 자금을 지원받으며, 이는 전체 비제한 수입의 15%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박스오피스 수익(전체 수익의 30% 이상), 민간 기부금, 상업적 수익 등으로 충당한다. 즉, 공적 지원과 시장 자율성이 결합된 혼합 모델이다.

2023-24년 로열 발레 및 오페라의 총 지출은 자본 지출을 제외하고 1억 7,200만 파운드에 달했으며, 이는 전년도 1억 5,500만 파운드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다. 이러한 증가는 인플레이션 압박과 노후화된 백스테이지 인프라 교체 필요성에 기인한다.

제도적 보수성과 변화의 압력

이런 시스템은 안정성과 제도적 권위를 제공하는 대신, 예술의 급진적 변화나 비판적 시도에 있어 보수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이라는 정체성은 곧 일정한 품격, 전통, 형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이어지며, 실험적 콘텐츠나 사회적 논쟁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발레단 내부에서도 클래식 중심의 레퍼토리가 여전히 중심에 놓이며, 젠더나 인종 다양성, 신체 해석의 변화는 점진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로열 발레 스쿨 역시 이런 구조 안에 있다. 이 학교는 교육부로부터 수년간 거의 동결된 수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훈련과 교육 비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상황에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다. 입학 경쟁, 커리큘럼, 공연 기회, 졸업 후 진로까지 모두 발레단과 밀접히 연결되며, 학생들은 일찍부터 '로열'이라는 상징 아래에서 성장한다.

새로운 후원자와 연속성

2024년 5월, 찰스 3세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로열 발레 스쿨 후원자직을 공식적으로 승계했다. 이는 왕위 계승 1주년을 기념하여 발표된 것으로, 1956년 로열 차터 이후 계속되어온 왕실 후원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찰스 왕은 이미 2003년부터 마가렛 공주의 뒤를 이어 로열 발레 스쿨의 총장직을 맡고 있었고, 이제 후원자로서 더욱 직접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로열 발레단의 경우, 찰스 왕이 2024년 5월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이미 1975년부터 로열 오페라의 후원자, 2009년부터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후원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코벤트 가든의 세 기관 모두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왕실과 예술 기관들 간의 관계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 파트너십임을 보여준다.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재검토

최근 들어 이런 구조에 대한 재검토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예술계 전반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요구하는 흐름 속에서, 로열이라는 제도 자체가 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현재 로열 발레 스쿨 학생의 90%가 재정 지원에 의존하고 있으며, 입학은 학업 능력이나 개인적 상황에 관계없이 순수하게 무용 재능과 잠재력을 기준으로 한다. 학교와 발레단은 장학제도 확대, 커뮤니티 오디션, 프로그램 다변화 등을 통해 외연을 넓히려 하고 있지만, 구조적 문제를 넘어설 만큼 급진적인 변화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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