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2/2> 믿음이라는 감옥
<지옥>의 세계관은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으로 시작되지만, 그 갈등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이 작품은 지옥의 사자가 찾아오는 현상을 신의 계시라고 해석하는 신흥 종교 '새진리회'를 통해 '죄'와 '도덕'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또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지옥>은 신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심판자로 자처하는 인간, 특히 다수의 이름으로 정의를 수행하려는 집단의 윤리 작동 방식을 조명한다.
시연이라는 스펙터클
작품의 주요 장치는 '시연'이다. 특정 인물에게 예고장(고지)이 날아들고, 정해진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등장해 그를 공개적으로 처형한다. 이 장면은 실시간 방송과 SNS를 통해 퍼지며,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로 소비된다. "그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명제는, 그 어떤 설명이나 증거 없이도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공포와 동시에 안도를 느낀다. "나는 아직 지옥의 통보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은 그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새진리회는 이 현상이 신의 의도라고 주장하며, 고지를 피하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고 자신들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설파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교단이 죄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죄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타인을 감시한다. 모호함은 불안을 만들고, 불안은 신념을 만든다. 도덕적 기준이 불분명할수록 사람들은 더 열정적으로 교리에 매달리게 되고, 믿음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단호하게 타인을 배척한다.
갓난아이의 고지, 균열의 시작
이와 같은 도덕적 긴장은 작품 후반부에서 정점에 이른다. 갓난아이에게 시연이 예고되는 사건은 이 세계의 균열을 드러낸다. 새진리회는 해석하지 못하고, 대중은 그 공백을 의심과 비난으로 메운다. "부모가 뭔가 잘못했겠지", "속죄할 일이 있을 거야"라는 추측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폭력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죄가 밝혀져야 심판이 가능한 게 아니라, 죄가 있기를 바라는 심리가 먼저 작동하는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에서는 갓 태어난 신생아가 고지를 받는 사건이 시즌 1 종반부에 벌어져, 이것이 죄가 있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작위 현상임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윤리적 질문을 다시 묻는다.
미디어와 폭력의 유통
작품 속 미디어는 이 폭력의 유통 경로다. 시연 장면은 단순한 뉴스가 아니라 흥행 콘텐츠가 된다. 스트리머는 조회수를 위해 중계를 하고, 댓글은 조롱과 정죄의 언어로 채워진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기 전부터 여론재판을 목격하고, 인터넷을 통해 개인의 삶이 파괴되는 장면들을 반복해서 본다. <지옥>은 현실의 그 냉혹함을 고스란히 복제해낸다.
이런 현실과의 접점은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형사 진경훈은 지옥의 사자 출현 사건을 수사하는 담당 형사로, 과거 아내를 잃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방송작가 배영재는 새진리회의 진실을 파고드는 방송국 PD이며, 그의 아내 송소현과 함께 갓난아이의 부모가 되어 시연의 당사자가 된다. 이들은 도덕의 바깥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다. 진경훈은 딸을 지키기 위해 교단과 타협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갈등과 체념이 깊게 배어 있다. 배영재와 송소현은 아이의 시연을 은폐하려는 시도 속에서 스스로 죄인이 되는 길을 택한다. 그들의 선택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다. '죄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들은 진실을 숨기는 대신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을 택한다.
이 선택은 드라마의 윤리적 전환점이다. <지옥>은 교리나 법이 아닌,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윤리 감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시연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아이를 보호하고 죽음을 감수하는 부모들의 행동은 지옥이라는 구조를 흔드는 균열이 된다. 초자연적 폭력은 피할 수 없지만, 그 폭력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할지는 인간의 몫이라는 점을 작품은 분명히 한다.
새진리회와 맞서는 변호사 민혜진의 활동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그녀는 법적 논리로 새진리회에 맞서지만, 결국 법을 넘어서는 인간적 연대를 통해 아이를 구하려 한다. 작품 후반 민혜진은 배영재 부부의 아기를 안고 탈출하며, 이 아이에게 '배재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는 죽은 부모를 기리는 동시에,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지속되는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다.
죄는 실재하는가, 만들어지는가
결국 <지옥>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죄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만들어내는가?" 드라마는 시즌 1의 최대 반전으로, 새진리회 교주 정진수가 사실 20년 전에 이미 고지를 받았고 죄와 무관하게 고지가 무작위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신의 의도"를 설파하며 거대한 종교를 만들어냈다. 드라마는 끝까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물음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지를 보여준다.
죄가 있기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단죄하고자 하는 충동, 그리고 그 속에서 침묵하거나 파괴되는 개인들. 새진리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단인 '화살촉'의 행태는 이런 집단 심리의 극단적 양상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지옥'을 구성하는 요소다.
《지옥》 시즌 1은 신의 뜻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죄인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왜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어야만 안심하는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그 심판은 언제나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이뤄진다. 2021년 11월 19일 공개된 이 6부작 드라마는 84개국 이상에서 넷플릭스 인기 순위 TOP 10에 진입하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작품이 던지는 질문들이 단순히 한국적 현실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문제임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