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재도약을 꿈꾸는 일본 반도체

엘노스 2025. 6. 18. 13:39



한때 일본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절대 강자였다. 1987년 일본의 DRAM 시장점유율은 약 80%에 달했고, 1988년 전체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약 50.3%로 정점을 찍었다. 1990년 기준 세계 반도체 기업 상위 10위 중 6개, 상위 20위 중 12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영광은 이제 산업 역사 속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다.

미일 반도체 협정의 충격

1986년 체결된 미일 반도체 협정은 일본 반도체 산업 쇠퇴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협정은 일본 기업들의 가격 덤핑을 문제 삼으며 체결되었고, 일본은 미국 정부가 설정한 최소 가격을 준수하고, 일본 내 외국 반도체 기업의 시장점유율을 10%에서 20%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일본 칩 메이커들의 경쟁 우위를 즉시 무력화시켰다. 가격 경쟁력을 잃고 자국 시장의 일부를 수입품에 내주게 된 것이다. 1987년에는 미국이 일본 메모리 칩에 100%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일본은 마이크로프로세서 같은 로직 칩에 투자하지 않고 DRAM 메모리에 집중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미국 업계는 메모리를 포기하고 CPU 등 컴퓨팅 파워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본 기업들은 수직 통합에 깊이 뿌리내린 채 팹리스 모델 채택을 주저했고, 이로 인해 혁신과 시장 대응력에서 뒤처졌다.

1990년대 일본이 대규모 자산 거품에 이어 장기 경기 침체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도시바는 메모리 부문을 분리했고, 엘피다(Elpida)는 2012년 파산을 맞았으며, 이후 미국의 마이크론에 인수되었다.

일본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990년 약 50%에서 2023년 기준 약 10% 이하로 급감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완성된 칩을 만드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소재와 장비를 공급하는 '그림자 파트너'로 재편됐다.

Rapidus: 일본의 야심찬 도전

2020년대 들어 일본 정부는 다시금 반도체 재건에 나섰다. 그 중심에는 'Rapidus'라는 이름의 신생 합작법인이 있다. 2022년 8월 설립된 이 회사는 덴소, 키옥시아, 미쓰비시 UFJ 은행, NEC, NTT, 소프트뱅크, 소니, 도요타 등 8개 일본 주요 대기업이 출자했다.

정부 지원 규모는 전례가 없다. 현재까지 정부 보조금은 총 1조7,200억 엔(약 120억 달러)에 달한다. 2025년 회계연도 예산에는 추가로 1,000억 엔이 배정되어 있다. 이시바 정부는 향후 7년간 10조 엔 이상을 반도체와 AI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Rapidus의 목표는 명확하다. 2027년까지 2나노미터급 첨단 반도체의 양산 체제를 갖추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 IBM과 협력해 2나노 공정 기술을 도입하고 있으며, 홋카이도 치토세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이다.

2025년 4월에는 파일럿 생산 라인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7월에는 프로토타입 칩 생산이 예정되어 있다. 2024년 12월에는 ASML의 EUV 리소그래피 장비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양산 대응용으로 도입되었다.

현실적 과제들

가장 큰 문제는 인력이다. Rapidus는 운영 시작까지 일본 내외에서 수백 명의 엔지니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일본은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낮아지면서 숙련된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해당 산업을 떠났고, 구조적인 인구 감소로 인해 인력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 특화된 팹리스 기업도 부족하고, EDA 소프트웨어 같은 핵심 툴 분야는 미국 독점이다. 단지 '공장'만 지어선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TSMC와 삼성전자는 이미 3나노미터 칩을 생산하고 있으며, 2025년 하반기부터 2나노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Rapidus가 2027년 양산을 시작하더라도 2년 늦은 출발이며, 초기 수율 문제로 인해 대량 양산은 더욱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8개 창립 기업의 민간 투자는 총 73억 엔(5,100만 달러)에 불과하다. Rapidus는 양산 목표 달성을 위해 총 5조 엔(350억 달러)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있다. 일부 제조업계 임원은 "정부 요청 때문에 투자를 고려할 수밖에 없지만, 프로토타입도 없는 회사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싶지는 않다"고 털어놓았다.

TSMC 유치와 정부 지원

일본의 반도체 전략에서 또 다른 축은 외국 기업 유치다. TSMC의 구마모토 1공장에는 약 4,760억 엔(35억 달러), 2공장에는 7,320억 엔(49억 달러)의 보조금이 지원되었다. 총 투자비는 1조 엔(67억 달러)을 넘어선다.

TSMC의 구마모토 1공장은 2024년 4분기부터 12nm, 16nm, 22nm, 28nm 공정의 양산을 시작했으며, 2공장은 2027년부터 6nm, 7nm 등 더 첨단 공정을 생산할 예정이다.

마이크론은 2023년 5월 히로시마 공장에 EUV 기술을 도입한 차세대 DRAM 생산을 발표했으며, 향후 몇 년간 최대 5,000억 엔을 투자할 계획이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에도 정부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소재·장비 분야의 독점적 지위

일본이 완전히 경쟁력을 잃은 것은 아니다. 일본은 코터/디벨로퍼에서 88% (도쿄일렉트론, 스크린홀딩스), 실리콘 웨이퍼에서 53% (신에츠화학, 스미코), 포토레지스트에서 50% (신에츠, JSR, 도쿄응화공업)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EUV 마스크 블랭크의 경우 호야(HOYA)와 AGC 두 회사만이 생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100% 시장점유율을 차지한다. 2024년 4월 일본의 반도체 장비 매출은 3,891억 엔으로 17개월 만에 최대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30%의 점유율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진행 중인 주요 프로젝트들 - 규슈의 TSMC, 홋카이도의 Rapidus, 히로시마의 마이크론, 나고야 인근의 키옥시아/웨스턴디지털, 규슈의 소니 센서 공장들은 모두 정부 개입 없이는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규슈에서만 2021년부터 2023년 사이에 스미코, 에바라, 도쿄일렉트론, 도쿄응화공업이 새로운 공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시장의 중심은 이제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AI, 전기차로 이동했는데, 일본 기업 중 이 흐름을 리드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은 여전히 시스템 수준의 통합과 수요 기반 혁신에서는 뒤처져 있다.

일본의 야당들은 정부가 결국 납세자 돈으로 Rapidus를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민간 투자 유치가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은 장기적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다

Rapidus가 홋카이도 치토세에 건설한 첨단 반도체 공장의 준공식에서 장중머우(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일본 반도체 생산의 르네상스가 될 것"이라며 일본과 대만의 협력을 강조했다. Rapidus의 상황은 1990년대 TSMC 창립 당시와 유사하다. 당시에도 대만 정부가 스타트업을 지원했고, 민간 기업들은 처음에는 열정적이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은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 여전히 강력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정부의 대규모 투자와 TSMC 등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제조 기반을 재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재도약이 될지는 미지수다. 시스템 반도체와 AI 시대에 맞는 생태계 구축이 없다면, 이번 시도는 또 다른 복고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