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한·중·일 조선업의 전략과 지정학

엘노스 2025. 6. 15. 08:07

LPG 운반선

 

동아시아는 여전히 세계 조선업의 중심이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세계 신조선 건조량의 85% 이상을 차지하며, 이 지역의 해양산업은 산업 구조, 전략 목표, 기술 역량에 따라 뚜렷하게 갈라진 길을 걷고 있다.

한국 - 기술집약과 친환경 전환의 선도자

 

2024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발주된 LNG 운반선은 78척 이상이며, 이 중 한국 조선 3사가 48척을 수주하며 시장을 주도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국내 조선업체는 고난도 선박 제작에 특화돼 있으며, 특히 한화오션은 약 23%의 점유율을 기록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LNG선을 수주한 기업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인력 구조의 한계


정밀 용접과 설계 등 고기술 공정에 필요한 숙련 인력의 고령화와 공급 부족은 지속적인 병목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의존이 늘고 있으며, 인건비 상승과 원자재 가격 변동성 역시 조선소의 경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특히 철강 강판 가격은 팬데믹 이후 거의 두 배 가까이 상승하며 수익성을 압박하고 있다.

친환경 기술 전환


국제해사기구(IMO)가 설정한 탄소 배출 감축 목표에 대응해, 한국은 LNG·암모니아 추진선, 스마트 조선소 구축 등을 통해 기술 우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HD현대는 중형급 암모니아 추진선 개발을 추진 중이며, 주요 조선업체들은 저탄소 선박 중심의 수주 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 - 물량 우위와 해양 전략의 결합

2024년 중국은 전 세계 신규 선박 주문량의 약 71-75%를 차지하며, 수주량 기준으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2024년 1~9월 기준 수주량은 약 8,711만 DWT로 전년 대비 50% 이상 증가했으며, 11월 기준 수주잔량은 224만 DWT, 3,256척에 달해 전체의 약 65%를 점유했다. 이처럼 중국은 벌크선·컨테이너선·탱커 등 대형 상선 분야에서 독보적인 생산 능력을 보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조선업을 단순 제조업이 아닌 전략산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CSSC(중국선박공업집단)의 통합, 금융·해운·항만과 연계된 패키지 정책, 민·군 융합 전략 등은 상선 조선이 군수 능력 확장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반영한다. 중국은 이를 통해 ‘해양 강국’ 전략의 물적 기반을 다지고 있다.

중국은 아직 고난도 LNG 운반선 분야에서는 한국에 비해 기술 격차가 존재하지만, 컨테이너선과 벌크선 등 범용 선박에서는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은 장기적으로 스마트 조선소 구축과 선박 기자재 국산화를 통해 기술 자립을 모색 중이다.

일본 - 산업 축소 이후의 선택과 재편

1980년대까지 세계 최대 조선국이었던 일본은 고비용 구조와 엔고, 경쟁력 저하 등으로 조선업의 전면 경쟁에서 이탈했다. 현재는 탱커 시장에서 3% 내외, 벌크선에서는 약 16%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범위다. 일본은 생산 능력보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조선업 자체보다는, 기자재·해양 인프라·환경 기술 분야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자동차, 정밀기계, 재료산업 등으로 자본과 인력을 재배치하고 있으며, 일부 조선소는 특수선 제작이나 해양 구조물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심화된 고령화와 조선업 공급망 축소는 회복이 어려운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규 인력 유입이 줄고, 부품·기자재 산업과의 연계도 느슨해지면서 산업 생태계 전반이 축소되는 양상이다.

지정학 속 조선업의 의미


LNG 운반선은 단순한 무역 수단을 넘어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자산이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이며, 이를 건조하고 운용할 수 있는 역량은 각국의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된다. 한국 정부도 수출입은행, 산업은행 등을 통해 조선업에 대한 정책금융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조선업, 해운업, 항만 산업을 일체화한 ‘해양 패키지 전략’을 통해 지정학적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특히 민·군 통합 설계 방식은 조선업이 군사 전략의 후방 인프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직접 조선에는 소극적이지만, 해양 인프라와 기술 이전, 기자재 수출 등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선박 자체보다는 주변 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기술 외교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공급망 재편과 탈탄소 시대의 도전

IMO는 2008년 대비 2030년까지 선박의 탄소 배출 강도를 40% 감축하고, 2050년에는 사실상 ‘넷제로’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028년부터는 톤당 최소 $100의 탄소세를 부과하는 제도가 시행될 예정이며, 이는 글로벌 선박 건조·운용 비용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LNG·암모니아 추진 기술과 디지털 조선소 구축을 통해 기술 선도국의 입지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막대한 공공투자를 바탕으로 친환경 선박 기술을 내재화하려 하며, 일본은 인프라와 연구개발 중심의 고부가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공급망 회복 탄력성과 원산지 다변화가 중시되면서 조선업은 단순 제조업이 아닌 전략 산업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조선소는 국가의 기술 자립, 탄소중립 이행, 해양 주권 강화 등 다층적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이 되었다.

결론


한국은 고부가가치 선박과 친환경 기술을 축으로 기술 중심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물량과 국가전략의 결합을 통해 해양 영향력을 넓히고 있으며, 일본은 조선업 자체보다는 주변 기술과 인프라를 활용한 재편 전략을 택하고 있다.

동아시아 조선업의 분화는 단순한 산업 전략의 차이가 아니라, 각국이 바라는 미래의 구조적 방향성을 투영하고 있다. 조선업은 이제 단순히 배를 짓는 산업이 아니라, 해양·에너지·기후·안보를 잇는 복합적인 지정학의 중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