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을 입다: 지방시 블랙 드레스의 정치학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프닝 시퀀스는 단 몇 분에 불과하지만,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히 복제되고 재해석되어 왔다. 이른 아침 뉴욕 5번가, 한 여성이 티파니 쇼윈도우 앞에 선다. 블랙 새틴 드레스, 오페라 글러브, 진주 목걸이, 선글라스, 그리고 종이봉지에서 꺼낸 크루아상.
그 '블랙 드레스'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여성성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정의였다.
검은색은 원래 죽음과 상실, 엄숙함과 권위의 색이었다. 동시에 절제된 관능과 신비로운 매력의 색이기도 했다. 홀리 골라이틀리가 아침 시간에 명백한 이브닝 파티 드레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 것은 1960년대 초 사회적 관습에 대한 조용한 반역이었다.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는 이 사회적 금기를 뒤집으며 블랙 드레스를 새로운 가능성의 도구로 만들었다. 홀리는 더 이상 남성의 시선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응시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 드레스의 탄생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지방시가 처음 디자인한 것은 무릎 정도까지 오는 짧은 버전이었다. 햅번은 이 드레스의 두 벌을 파라마운트로 가져갔지만, 영화사는 '배우의 다리를 너무 많이 드러낸다'며 난색을 표했다. 의상 감독 에디스 헤드가 하반신을 재디자인했고,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바로 헤드가 수정한 버전이었다.
흥미롭게도 지방시가 실제로 제작한 드레스들은 영화나 홍보 사진 촬영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영화에서 사용된 에디스 헤드의 드레스들은 촬영 후 폐기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지방시 vs 디올
지방시의 미학을 이해하려면 당시 패션계를 지배하던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New Look)'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1947년 디올의 뉴룩은 전후 복원의 상징이었다. 둥근 어깨, 꽉 조인 허리, 매우 풍성한 스커트. 디올의 '코롤라(Corolle)' 라인은 "부드러운 어깨, 피어나는 가슴, 덩굴 줄기처럼 가는 허리, 그리고 꽃봉오리처럼 열리는 스커트"를 추구했다.

지방시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소매 없는 바닥까지 닿는 가운, 몸에 자연스럽게 맞는 보디스, 뒤쪽의 독특한 컷아웃 데콜테, 한쪽에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슬릿. 디올의 여성이 '장식되고 감상되는 존재'였다면, 지방시의 여성은 '스스로 선택하고 응시하는 주체'였다.
두 개의 홀리
오드리 햅번이 연기한 홀리와 트루먼 카포티가 원작에서 그려낸 홀리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카포티의 원작에서 홀리는 18-19세의 금발 여성으로, 1940년대 전쟁 시기가 배경이다. 그녀는 '아메리칸 게이샤'로 묘사되며, 부유한 남성들과 사교 활동을 하며 선물과 돈을 받아 생활하는 현실주의자다.
흥미롭게도 카포티의 원작에서 홀리는 실제로 티파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홀리가 티파니를 둘러보며 "40세 이전에 다이아몬드를 착용하는 것은 천박하다"고 말하는 장면들은 모두 영화의 창작이다.
영화에서는 동성애자였던 원작의 화자가 이성애자 남성 주인공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인 톤도 로맨틱 코미디로 변화했다. 원작이 자유분방한 파티 걸에 대한 캐릭터 스터디였다면, 영화는 불안정한 여성을 구원하려는 남성에 대한 할리우드식 러브 스토리가 되었다.
지방시의 블랙 드레스는 이 두 버전의 홀리를 모두 아우르는 상징이 되었다. 원작의 현실적 감각과 영화의 로맨틱한 꿈을 동시에 담아내는 복잡한 여성성의 표현 말이다.
완벽한 스타일링
홀리의 목걸이는 지방시를 위해 주얼리를 디자인했던 프랑스 주얼러 로저 스케마마가 제작했다. 다층의 진주가 캐스케이드처럼 흘러내리는 형태. 바닥까지 닿는 드레스, 정교한 목걸이, 머리에 꽂은 브로치, 오버사이즈 선글라스, 팔꿈치까지 오는 블랙 오페라 글러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뤘다.
전 지방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의 평가: "앞면은 엄격하고 우아하며 매우 깔끔하지만, 뒤쪽에는 에스닉과 파리지앵 사이 어딘가에 있는 매우 흥미로운 네크라인이 있다. 당시 다른 디자이너들이 갖지 못했던 부드러움이다."
지방시는 미니멀리즘의 차가운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적 온기를 잃지 않는 절제미를 추구했다. 드레스의 뒤쪽 컷아웃은 단순한 노출이 아니라, 착용자의 개성이 스며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복잡한 드레스의 운명
현재 지방시가 제작한 햅번 드레스의 정확한 개수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정보들이 있다. 일부 자료는 세 벌, 다른 자료는 네 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중 한 벌은 지방시 하우스의 개인 아카이브에 영구 보관되어 있고, 한 벌은 햅번과 가까웠던 가족 친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점이다.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2006년 크리스티 경매의 이야기다. 이 드레스는 £467,200(당시 약 $923,187)에 팔렸고, 수익금은 전액 캘커타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 건설에 사용되었다. 지방시가 《기쁨의 도시》의 저자 도미니크 라피에르와 그의 아내에게 자선 기금 마련을 위해 기증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한 벌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의상 박물관(Museo del Traje)에 전시되어 있다. 일반인들이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오리지널이다.
60년 후에도 여전한 매력
이 드레스가 60년 넘게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던지는 질문들이 여전히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떻게 자신을 표현할 것인가?
2020년대의 새로운 맥락들 - SNS 시대의 자기표현, 젠더 정체성의 다양화, 지속가능한 패션에 대한 관심 - 이 등장했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변하지 않았다.
패션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우리가 입는 옷은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적 가치와 권력 구조를 반영한다. 지방시의 블랙 드레스가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기존 규칙을 깨뜨렸기 때문만이 아니다. 여성이 자신의 몸과 이미지에 대한 주도권을 갖는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민권 운동의 확산. 전통적인 성 역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방시의 드레스는 이런 변화의 전령이었고, 동시에 그 변화를 가속화하는 촉매였다.
드레스를 입은 홀리가 티파니 앞에서 크루아상을 먹는 장면. 단순한 아침 식사가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블랙 드레스는 말이 없다. 화려한 색채도, 과장된 실루엣도, 복잡한 장식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침묵과 절제 속에서 가장 강렬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오늘날 많은 패션 아이템들이 브랜드 로고나 화려한 장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지방시의 드레스는 그 자체의 순수한 형태와 비례로 말한다. 진정한 자신감과 품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모든 것이 크고 화려하고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때로는 조용한 목소리가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후 지방시의 블랙 드레스는 수없이 복제되고 오마주되어 왔다. 고급 브랜드부터 패스트 패션까지, 모든 레벨의 패션 브랜드들이 이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최근 몇 년간 다양한 셀러브리티들과 패션 아이콘들이 레드카펫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지방시 스타일의 블랙 드레스를 선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유명한 드레스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드레스가 상징하는 독립적이고 우아한 여성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방시의 블랙 드레스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다. 그것이 제시한 미학적 원칙들 - 절제의 힘, 본질에 대한 집중, 착용자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 - 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