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2/2> 부림 사건의 영화적 재구성
영화 <변호인>은 1981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 사건'을 토대로 한다. 당시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서적 읽기 및 공산주의 혁명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기소한 사건이다. 이들은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 고문',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부림'이라는 명칭은 '부산의 학림(學林)'이라는 말을 줄여 붙인 것으로, 앞서 발생한 서울의 '학림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변호인>은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재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부림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송우석이라는 변호사의 성장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용해시킨다.
감정적 진실의 재구성
<변호인>은 부림 사건을 과거의 한 에피소드로 박제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지금-여기'의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연결시키는 매개 장치로 활용한다. 피의자들의 불법 구금 장면, 고문 흔적을 은폐하려는 공권력의 모습, 그리고 형식적 절차로 전락한 재판 과정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반복적으로 경험해온 구조적 폭력의 현재적 얼굴이다.
이러한 재현 방식은 관객에게 분노와 슬픔, 무력감, 그리고 연대의 감정을 순차적으로 불러일으킨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고문 장면의 침묵, 어머니의 절규, 그리고 판결문 낭독 시의 정적은 모두 관객을 단순한 구경꾼에서 '역사의 능동적 목격자'로 전환시킨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화가 '사실적 재현'을 넘어서 '감정적 진실'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변호인>은 현실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감정의 언어로 번역한다. 부림 사건 피해자 송병곤씨는 "통닭구이(깍지 낀 손을 무릎 아래로 집어넣고 그사이 막대기를 넣어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 같은 굵직한 고문을 당한 사실"을 증언했다. 이러한 고통받는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은 공식 기록에서 누락된 진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정확한 재연'이 아니라 '기억의 감정적 진실'을 되살리는 방식으로, 역사 다큐멘터리와는 차별화된다.
평범한 악의 구조적 메커니즘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 개념은 <변호인>의 권력 재연 방식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영화 속 공권력은 괴물적 존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수사관들은 무표정하고 절차에 익숙하며, 판사는 감정을 배제하고 중립성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바로 그들의 침묵과 무표정이야말로 이 시스템의 진정한 공포다.
이러한 묘사는 개별적 악인을 지목하는 단순한 구도를 넘어서, 구조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영화는 감정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그 감정을 바탕으로 구조적 비판을 가능케 한다. 관객은 개인의 악행에 분노할뿐 아니라, 그러한 악행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변호인>은 감정을 매개로 관객과 당시 국가폭력 피해자들 사이의 정서적 연대를 구축한다. 이는 일회적 동정심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책임을 환기하는 정치적 장치로 기능한다.
역사적 정의의 지연된 실현
부림 사건은 2014년 2월 13일 부산지법에서 재심 청구인 5명에게 33년 만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고, 같은 해 9월 25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경찰 수사과정에서 상당기간 불법 구금된 사실이 인정된다"며 "불법 구금과 자백 강요로 인한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를 인정했다. 이러한 사법부의 뒤늦은 인정은 영화가 제기한 문제의식의 정당성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94년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돈 잘 벌던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재야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영화 개봉 후 실제 부림 사건의 재심이 진행되어 무죄가 확정된 것은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현실에 개입하는 정치적 텍스트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