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1/2> 국가와 개인의 대결 – 헌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1980년대 초 부산의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 <변호인>은 국가와 개인, 권력과 양심 사이의 처절한 대결을 통해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해야 할 정의가 어떻게 현실에서 참혹하게 왜곡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창기 변호사 시절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영화는 '헌법'이라는 상징을 중심축에 세움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질문을 던진다.
1981년 부림사건: 역사적 배경
영화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부산 지역의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부림'이라는 명칭은 앞서 발생한 '무림사건', '학림사건'의 '림'자 돌림에 맞춘 것으로,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진 용공조작 사건의 일환이었다.
피해자들은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되어 구타는 물론 물고문과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당했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같은 시중에서 파는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으며, 당시 공소장에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등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실용에서 신념으로
주인공 송우석(송강호)은 초반부에서 철저히 실용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부동산, 세금, 상속 관련 업무에 매달리며 오직 돈만을 좇는 그의 모습은 '사람보다 법이 우선'이라는 차가운 현실주의를 체현한다. 법은 그에게 생계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부림사건의 피고인들이 고문과 조작의 희생양이 되어 법정에 끌려나오는 순간, 그의 세계관은 균열을 맞는다.
실제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건을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회고했으며, "어쩌다보니 이 사건에 손대게 되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단순한 선악 구조로 설명하지 않는다. 송우석의 각성은 점진적이고 복잡하다. 그는 자신이 지켜온 안전한 경계선을 넘어서야 할 때가 언제인지,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정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영화의 백미는 송우석이 법정에서 헌법을 인용하며 변론을 펼치는 장면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이 친숙한 구절이 고문당한 대학생 앞에서, 침묵하는 판사와 조작된 증거들 사이에서 울려 퍼질 때, 이 문장은 살아있는 현실의 언어가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헌법은 오랫동안 '명목상의 정의'에 머물렀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공권력의 폭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화는 바로 이 참담한 간극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법은 과연 누구의 편에 서는가? 헌법은 진정 누구를 보호하는가? 이는 단순히 과거의 질문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물음이다.
영화 속에서 송우석이 인용하는 헌법 제26조 4항(무죄추정의 원칙)은 1981년 당시 제5공화국 헌법의 정확한 조항번호로, 영화는 시대적 고증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허구와 사실의 경계
영화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부림사건의 변호인은 총 5명이었으며, 김광일 변호사의 추천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여하게 되었다. 영화 속 군의관 윤 중위의 양심선언은 허구이지만, 실제로 고문 후 치료해주던 경찰병원 의사가 있었다. 또한 영화에서처럼 변호인이 E. H. 카의 신원을 확인해준 영국 대사관의 편지를 공개한 사실은 없다.
이러한 영화적 각색에도 불구하고,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노무현이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에 임했다"고 증언했으며, 그의 헌신적 노력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패배하는 개인, 살아남는 언어
<변호인>이 보여주는 법정은 더 이상 '정의가 실현되는 성스러운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오히려 '합법의 외피' 아래에서 진실이 매장되는 기만의 무대에 가깝다. 증거는 이미 조작되어 있고, 판결 역시 미리 내려져 있다. 송우석은 자신이 패배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헌법'이라는 언어를 방패이자 창으로 삼아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한다.
여기서 영화는 깊이 있는 반전의 구조를 드러낸다. 개인은 패배하지만, 그의 언어는 살아남는다. 송우석의 변론은 기록되고, 반복되고, 관객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이는 법이 현실에서 제 기능을 상실할 때, 언어가 법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역사는 결국 송우석의 변론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2014년 9월 대법원은 부림사건 피해자 5명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억울함을 푸는데만 33년이 걸린 것이다. 부산지법은 "피고인들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협했다고 볼 수 없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당시 송우석이 법정에서 외쳤던 "이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휴머니스트"라는 변론이 법적으로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영화 <변호인>은 헌법을 단순한 제도적 규범이 아닌, 윤리적 실천의 근본 기반으로 다시 호출한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헌법이 있는 겁니다"라는 절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한 문장은 법이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약속이며, 헌법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준다.
영화는 마지막에 송우석을 위해 변론에 나선 99명의 변호사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개인의 용기가 다른 이들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연대로 확산되어 결국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 연대의 힘을 믿게 만드는 강력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