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2/2> 보통 사람들의 연대
고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하는데, 이는 영화 초반부에 빠르게 다뤄진다. 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 중간에 박처장(김윤석) 얼굴 위로 전두환의 얼굴이 중첩되는 장면에서 이 비극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명명백백히 드러낸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대신 교도관, 대학생, 기자, 주교, 그리고 이름 없는 시민들이 화면을 채운다.
이들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을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바로 이 평범함에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동력을 발견한다. <1987>이 보여주는 것은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작은 양심의 목소리들이 모여 만들어낸 변화의 물결이다.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의 여정은 이 영화의 핵심을 압축한다. 그는 처음부터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었다. 오히려 체제 안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온 소시민이다. 실제 사건에서는 휴지에 편지를 써서 전달했으나, 영화에서는 잡지(선데이서울) 사이에 편지를 써서 전달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하지만 교도소에 갇힌 가해자의 뻔뻔한 태도, 복사실에서 우연히 본 의문스러운 문건, 반복되는 은폐 지시 앞에서 그는 서서히 불편함을 느낀다.
한병용의 행동은 극적이지 않다. 서류를 몰래 복사하고, 기자에게 조심스럽게 단서를 전달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소극적이고 일상적인 행위가 진실 추적의 첫 단추가 된다. 정의는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불편함과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대학생 연희(김태리)는 영화에서 창작된 인물로, "당시 보통 사람들, 서민 사람의 마음으로 저항하고 싶지만 저항할 수 없었던,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필요"해서 만들어졌다. 그녀는 정치적 무관심층의 대표다. 시위와 폭력을 피하고 싶어 하고, 삼촌이 남영동 수사관이라는 개인적 연결고리 때문에 더욱 복잡한 처지에 놓인다. 운동권 친구와 가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이한열과 연희의 관계는 허구다. 하지만 친구의 죽음과 부당한 체포를 목격하면서 연희는 변화한다. 이 변화는 갑작스런 사상적 전향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남영동이라는 이름 앞에서 느끼는 공포, 친구를 잃은 슬픔, 불의에 대한 분노가 그녀를 거리로 이끈다.
<1987>의 인물들은 누구도 혼자서 역사를 바꾸지 않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신성호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고, 이는 곧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정점이었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실제 최환 검사는 1990년대 말까지 검사로 활동했으며, 영화에서는 중반부터 변호사로 등장하지만 이는 극적 구성을 위한 각색이다. 언론인 윤상삼의 보도, 검사 최환의 기소 지시, 김정남 주교의 고발, 그리고 시민들의 거리 행진은 각각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때 '사건'이 아닌 '변화'가 일어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다음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그 용기가 또 다른 이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도미노가 연쇄적으로 쓰러지듯, 개별적 양심들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전체 그림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각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집단적 응답으로서의 민주주의
<1987>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신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조명한다. 아이를 업은 여성, 깃발을 든 노인, 교복 입은 학생들. 그 장면 위에 실제 6월 항쟁의 기록 영상이 겹쳐진다.
이 결말은 민주주의가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적 참여로 만들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듯이,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선택들의 누적이다.
참을 수 없는 순간, 외면할 수 없는 현실, 미안해지는 감정 앞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이 정치다. 그 선택들이 모일 때,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된다. <1987>은 그래서 과거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