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쟁의 전초전 – 엔비디아, 텐센트, 그리고 AI 칩
한때 게이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GPU가 이제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무기로 변모했다. 인공지능을 '훈련'시키는 고성능 AI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은 단순한 기술 각축을 넘어, 21세기 디지털 패권의 향방을 좌우하는 결정적 순간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엔비디아(NVIDIA)와 중국 빅테크들의 치열한 대립이 펼쳐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절대 지배 – GPU가 권력이 된 시대
2024년 기준, 엔비디아는 AI 칩 시장에서 압도적인 88-90%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사실상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확보했다. ChatGPT의 등장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GPT-4와 같은 대형 언어모델은 수천억 개의 파라미터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데, 이는 순차적 연산에 특화된 전통적인 CPU로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엔비디아는 현재 40,000개 이상의 기업과 400만 명의 개발자가 머신러닝과 인공지능을 위해 자사 GPU를 사용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엔비디아의 H100, H200 GPU는 단순한 하드웨어를 넘어 AI 시대의 석유로 불린다. 메타는 차세대 Llama 4 모델 훈련을 위해 16만 개의 GPU를 사용할 예정이며, 이는 Llama 3에 사용된 것의 10배에 달한다.
H100 하나의 가격은 2만 5천 달러에서 시작해 4만 달러까지 치솟고 있지만,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은 이를 수천 개씩 구매해 거대한 GPU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2025년 4분기 매출 전망을 375억 달러로 제시했는데, 이는 2024년 4분기 대비 175억 달러 증가한 수치다.
미국의 전략적 봉쇄
2022년 10월 이후 미국은 연이어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를 강화했으며, 2024년 12월과 2025년 1월에도 추가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핵심은 AI 훈련용 고성능 GPU의 對중국 수출 전면 차단이었다. 엔비디아는 최근 새로운 트럼프 행정부의 H20 칩 對중국 수출 라이선스 요구로 인해 최대 55억 달러의 비용 손실을 예상한다고 발표했다.
2024년 12월 제재에서는 처음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에 대한 전국가적 수출 제한이 도입됐다. 이는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라 중국의 AI 발전 자체를 구조적으로 제약하려는 기술 냉전의 선전포고였다.
2024년에는 "Luxuriate Your Life"라는 회사를 통해 델과 슈퍼마이크로 사로부터 3억 9천만 달러 상당의 금지된 엔비디아 GPU가 포함된 서버를 구매해 말레이시아로 밀수한 사례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밀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중국의 반격 – 자립의 의지와 딥시크의 충격
중국도 가만히 당하지 않았다. 바이두는 AI 전용 칩 '쿤룬(昆仑) 3세대'를 출시했으며, 2025년 초 1만 개 GPU 규모의 완카 클러스터 운영을 시작했다. 알리바바의 T-Head는 AI 추론 칩 '퉁이(含光) 800'을, 텐센트는 '뤄옌' 프로세서를 공개했다.
그런데 2025년 1월, 중국 AI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출시한 R1 모델이 OpenAI의 GPT-4와 견줄 만한 성능을 보이면서 글로벌 AI 업계에 충격을 주었다. 딥시크는 단 600만 달러의 훈련 비용으로 이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OpenAI가 수억 달러를 투입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딥시크의 성공은 알고리즘과 아키텍처 개선에서 나온 것으로, 우수한 컴퓨팅 하드웨어나 독특한 데이터셋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분석됐다. 딥시크는 MoE(Mixture-of-Experts)와 MLA(multihead latent attention) 같은 비용 효율적인 AI 아키텍처에 집중했다.
중국 빅테크들의 대응 전략
2025년 1분기, ByteDance,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기업들은 엔비디아 H20 칩에 최소 160억 달러 규모의 주문을 넣었다. 동시에 이들은 자체 칩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텐센트는 2024년 자본 지출을 전년 대비 3배 증가한 107억 달러로 늘렸으며, 4분기에만 AI 이니셔티브에 54억 달러를 투입했다. 중국 정부도 중국 중앙은행을 통해 향후 5년간 AI 공급망 강화를 위해 1조 위안(1,370억 달러)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AI 패권 경쟁은 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데이터, 알고리즘, 인재라는 3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진정한 AI 강국이 될 수 있다. 2024년 말 딥시크-v3가 출시되면서, 알리바바와 텐센트도 각각 경쟁력 있는 추론 모델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구글의 전 CEO 에릭 슈미트는 2024년 5월 "미국이 AI에서 2-3년 앞서 있다"고 자신했지만, 11월 하버드 케네디 스쿨 강연에서는 "중국이 격차를 줄이고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칩 제재가 그들을 막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라며 입장을 바꿨다.
중국의 2017년 공식 AI 전략에서 설정한 목표가 현실화되고 있다. "2025년까지 중국이 AI 기초 이론에서 주요 돌파구를 달성하고, 일부 기술과 응용에서 세계 선도 수준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AI 반도체 전쟁의 본질은 기술 통제권을 둘러싼 패권 다툼이다. 미국은 엔비디아를 앞세워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를 장악하고, 이를 지정학적 레버리지로 활용하려 한다.
반면 중국은 디지털 주권이라는 기치 아래 외부 종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시진핑 주석이 강조하는 '신질생산력(新质生产力)' 전략의 핵심이 바로 AI와 반도체 등 첨단 분야의 기술 혁신을 통한 성장과 생산성 향상이다.
딥시크 R1의 등장은 단순히 하나의 AI 모델 출시를 넘어 "AI 효율성 전쟁"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월 27일 애플 앱스토어에서 ChatGPT를 제치고 1위에 오른 이후, 엔비디아를 포함한 주요 기술주들의 시가총액이 1조 달러 이상 급락했다.
딥시크의 성공은 미국의 독점적 AI 모델에 대한 중국의 오픈소스 접근법의 승리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은 정부 지원 연구기관과 주요 기술 기업 간의 협력을 통해 번성하는 AI 생태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의 수출 통제가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앞으로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더욱 강력한 칩들이 10배, 100배, 1000배 규모로 확장 배치되기 시작할 때 중국이 가장 심각하게 차단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중 AI 반도체 전쟁은 이제 막 서막을 올렸다. 딥시크의 등장으로 "효율성 vs 규모"라는 새로운 경쟁 축이 형성됐지만, 근본적인 하드웨어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단순히 칩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국력의 핵심 지표가 된 시대에 누가 디지털 패권을 쥘 것인가의 문제다.
경쟁은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실리콘 웨이퍼 위에 새겨진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21세기 권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앞으로 수십 년간 글로벌 질서를 주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