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반도체 전쟁의 서막 – 미국이 '반도체'를 제재한 이유

엘노스 2025. 6. 11. 17:05

 

2018년 4월, 중국 통신장비 대기업 ZTE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미국 상무부가 ZTE에 대해 향후 7년간 미국 기업과 거래를 할 수 없도록 하는 추가 제재를 단행한 순간, 11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이 사실상 가동을 멈췄다. 표면적인 이유는 북한·이란과 불법 거래를 하고 제재를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ZTE는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핵심 부품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퀄컴과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등으로부터 휴대전화 네트워크 장비를 사들여 제품을 만들던 구조였다. 미국 기술 없이는 단 하나의 제품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업 제재가 아니었다. 미국이 처음으로 반도체라는 '산업의 쌀'을 전략적 무기로 사용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과거의 기술 제재가 특정 분야에 국한됐다면, 이번은 달랐다. 현대 산업 전체의 신경계인 반도체를 겨냥한 것이었다.

진짜 전쟁의 시작, 화웨이 제재

ZTE 사태가 경고탄이었다면, 2019년 5월 16일 미국 상무부가 화웨이를 '수출통제 기업 리스트'(Entity List)에 추가한 것은 본격적인 전쟁 선포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화웨이를 엔티티 리스트에 올리며 사실상의 거래 단절을 선언했다. 명분은 '국가 안보'였다. 화웨이가 중국 정부의 사실상 대리인이며, 5G 장비에 감청 장치를 심을 수 있다는 의혹이었다.

하지만 제재의 파급력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미국의 '25% 룰'이 발동된 것이다. 미국 기술이 25% 이상 들어간 모든 부품은 화웨이에 공급할 수 없다는 규정이었다. 문제는 이 기준이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대만 TSMC는 화웨이의 최첨단 스마트폰 칩 '키린' 시리즈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미국산 반도체 제조 장비로 만든 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네덜란드 ASML은 중국향 EUV(극자외선) 장비 수출을 포기해야 했다. 장비 내부에 미국 기술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심지어 영국의 ARM도 화웨이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검토해야 했다.

이는 단순한 수출 통제가 아니었다. 미국이 글로벌 기술 공급망의 '스위치'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지정학적 시위였다.

왜 하필 반도체인가

미국이 반도체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현대 문명의 구조에 있다.

첫째, 군사력의 핵심이다. 오늘날 전쟁은 칩으로 싸운다.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 F-35에는 수많은 프로세서가 들어간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정밀 타격 능력도, 위성의 실시간 정보 수집도, 사이버전 수행 능력도 모두 반도체 성능에 달려 있다. 2020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드론이 기존 방공망을 무력화시킨 장면을 보라.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건 탱크의 개수가 아니라 칩의 성능이다.

둘째, 경제 패권의 토대다. 반도체는 현대 경제의 '원유'다. 스마트폰, 자율주행차,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암호화폐 채굴까지 디지털 경제의 모든 영역이 반도체 위에서 작동한다.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2030년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1조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석유 시장과 맞먹는 규모다.

셋째, 데이터 주권의 열쇠다. 21세기는 데이터의 시대다. 누가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하고, 더 효율적으로 분석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AI 학습에 필요한 GPU, 빅데이터 처리를 위한 서버 칩, 5G·6G 통신을 위한 기지국 반도체까지 정보 처리의 모든 단계에서 반도체가 핵심 역할을 한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위기감

미국의 반도체 제재를 이해하려면 중국의 급속한 기술 추격을 봐야 한다. 2000년대만 해도 중국은 단순 조립 기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2014년 중국은 '국가 반도체 산업 발전 추진 강요'를 발표하며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다. 1,400억 달러 규모의 국가 반도체 펀드를 조성했고, 해외 인재 영입에 나섰다. 그 결과 화웨이의 하이실리콘은 스마트폰 칩 분야에서 퀄컴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더 위험한 건 중국의 시스템 반도체 역량이었다. 감시 카메라, 안면 인식, 사회 신용 점수 시스템에 들어가는 AI 칩들을 자체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중국식 디지털 권위주의가 기술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기술 패권뿐 아니라 가치 체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바이든의 '스마트 봉쇄'

트럼프가 거친 방식으로 시작한 반도체 전쟁을 바이든은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2022년 10월 7일 발표된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는 그 집대성이었다.

이번엔 단순히 특정 기업을 겨냥하는 게 아니었다. 중국의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표적으로 삼았다. 14나노미터 이하 첨단 공정 기술, AI 가속기, 슈퍼컴퓨터용 칩까지 포괄적으로 규제했다. 더 나아가 미국인의 중국 반도체 기업 취업까지 금지했다.

동시에 '칩4 동맹'을 통해 한국, 일본, 대만과 공급망 연대를 구축했다. 5,280억 달러 규모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으로 자국 내 생산 기반을 강화했다. 중국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대안 체계를 구축하는 투트랙 전략이었다.

새로운 냉전의 시작

이제 분명해졌다. 미중 반도체 전쟁은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다. 21세기 패권을 놓고 벌이는 새로운 형태의 냉전이다. 과거 냉전이 핵무기와 이데올로기의 대결이었다면, 지금은 반도체와 데이터의 대결이다.

승부의 향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중국은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질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립을 위한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ZTE는 2019년 매출액이 6.1% 증가한 907억 위안(약 15조4000억원)으로 회복됐고 51억4800만위안(약 875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며 흑자로 돌아섰다. 미국은 동맹국들과의 연대를 통해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려 한다. 그 사이에서 삼성전자, TSMC, ASML 같은 핵심 기업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반도체라는 작은 칩 위에 거대한 세계가 올려져 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미래를 놓고 지금 역사상 가장 치열한 기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