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2/3> 냄새는 계급을 말한다

엘노스 2025. 6. 11. 08:18

 


《기생충》에서 가장 폭력적이고도 결정적인 한마디는 "아저씨는 지하철 냄새가 나요"라는 말이다. 박사장 부부의 아들 다송은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지만, 이 짧은 문장은 기택을 포함한 하층민들이 넘어설 수 없는 선을 찌른다. 냄새는 보이지 않고, 이름도 붙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더 잔혹하게 작동한다.

이 대사가 특히 충격적인 이유는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아직 사회적 예의를 체화하기 전이라, 가장 솔직하게 감각적 차이를 표현한다. 다송의 말은 그래서 가식 없는 계급 인식의 발현이다. 그는 학습된 차별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체득된 구분을 내뱉는다. 이는 계급 차별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주는 무서운 순간이다.

반지하의 후각적 현실

봉준호는 이 냄새를 단순한 위생 문제나 희화화의 도구로 쓰지 않는다. 오히려 후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계급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기택네 가족은 같은 비누, 같은 세제를 쓰지만, 모두가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이는 곧 그들의 계급적 위치가 감각 차원에서 이미 표식화돼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반지하 주거 환경은 구조적으로 냄새가 배어들 수밖에 없다. 지하 공간의 특성상 습도가 높고 통풍이 어려우며, 하수관이 근접해 있어 다양한 냄새가 섞인다. 여기에 좁은 공간에서 요리, 세탁, 생활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생활 냄새가 집약된다. 또한 반지하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 시내버스, 찜질방 같은 공공시설들도 특유의 냄새를 갖고 있다.

이는 '냄새'가 개인의 선택이나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주거와 생활 인프라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력이 곧 깨끗한 공기와 쾌적한 환경에 대한 접근권을 결정하는 셈이다. 하지만 중산층 이상은 그것을 개인의 청결 문제로 환원해버린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태도로 전가하는 순간, 차별은 더욱 교묘해진다.

거리두기의 미학적 실천

냄새는 또한 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박사장 부부는 언제나 적당한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차 안에서도, 집 안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는' 선까지만 상대를 받아들인다. 박사장은 기택을 일 잘하는 기사로 인정하지만, 그가 '선을 넘지 않으면' 괜찮다고 말한다. 이때 말하는 선이란, 실제 공간을 나누는 선이자, 후각을 자극하지 않는 거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박사장 부부의 '세련된' 차별 방식이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프로페셔널하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식으로 포장한다. 이는 현대 한국 중상층의 전형적인 계급적 거리두기 방식이다. 직접적 차별보다는 '취향'과 '매너'의 언어로 경계를 만든다. 냄새는 그 경계선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완벽한 도구다.

특히 차 안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의 냄새는 더욱 민감한 문제가 된다. 고급 세단의 가죽 시트와 방향제 냄새 속에서, 기택의 '다른' 냄새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같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결코 섞이지 않는 두 계급의 감각적 충돌을 상징한다.

감각적 모멸의 누적과 폭발

다송의 말에 기택이 정색하지 못하고 애써 웃는 장면, 박사장이 코를 살짝 움찔하는 장면은 이 감각적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누적적인지 보여준다. 폭력은 언제나 큰 소리로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미묘한 표정, 짧은 몸짓, '그냥 그런 느낌' 같은 것들로 지속된다.

이런 미시적 폭력들은 특히 한국 사회의 '눈치' 문화와 맞물려 더욱 강력해진다. 기택은 다송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 고용 관계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그로서는 '어른스럽게' 넘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의 모멸감은 사라지지 않고 몸에 축적된다.

영화 후반, 기택이 결국 박사장을 찌르는 장면은 그렇게 축적된 감각적 모멸감의 정점이다. 박사장이 근세의 시체 냄새에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기택에게는 그동안 참아온 모든 후각적 차별이 한꺼번에 되살아난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프로페셔널한' 기사가 아니라, 냄새로 구분당하는 계급적 존재로 전락한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와 후각 자본

이 지점을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설명해보면, '구별짓기(distinction)'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지배계급은 문화적 취향과 감각적 판단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정당화하고 계급적 경계를 유지한다. 냄새를 감지하는 능력과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조차 계급 구조 속에서 학습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후각 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 경제 자본이 좋은 주거 환경과 생활 인프라를 제공하고, 문화 자본이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를 구분하는 감각을 형성한다. 그리고 사회 자본이 그런 감각적 구분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기생충》은 바로 이 '후각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를 드러낸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냄새'는 문화적으로 매우 민감한 영역이다. '냄새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후각적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성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는 유교적 청결 관념과 근대적 위생 담론이 결합된 독특한 한국적 현상이다.

젠트리피케이션과 냄새의 추방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는 도시 공간의 젠트리피케이션과도 연결된다.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냄새나는' 것들—재래시장, 쪽방촌, 공장지대—은 체계적으로 추방된다. 대신 '깨끗하고 세련된' 공간들이 들어서고, 그런 공간에 적응할 수 있는 계층만이 살아남는다.

2010년대 이후 서울의 대규모 재개발 과정에서 반지하나 고시원 같은 저소득층 주거시설들이 줄어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리적 공간의 정화는 곧 사회적 순화를 의미한다. 냄새는 그 과정에서 가장 민감한 지표가 된다.

《기생충》의 냄새는 결국 우리 사회의 후각 구조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말로는 평등을 말하지만, 냄새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경계한다. 이 감각의 정직함은 때로 잔인하게 작용하고, 그래서 더 부정하기 어렵다. 말로는 다르지 않다 해도, 코는 이미 알고 있다.

이는 무의식적 차별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의식적으로는 평등을 지향하지만, 감각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계급적 구분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감각적 구분이 의식적 판단보다 더 강력하게 행동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봉준호가 '냄새'라는 소재를 택한 것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냄새는 논리나 도덕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차별의 형태다. 그래서 더욱 은밀하고, 더욱 잔혹하며, 더욱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기생충》의 진짜 공포는 괴물이나 귀신이 아니라, 바로 이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차별의 메커니즘에 있다.